
이집트 고대 신학에 의하면
페이윰의 거대한 호수는 “눈(Nun)”이라는 모든 생명의 기원인 바다로 일컬어졌고 수도 부근의 고지대는 “세뎃(Shedet)”이라는 모든 생명이 존재화된 언덕으로 일컬어졌다.
기원전 3000년, 메네스(Menes) 왕은 사냥을 하다 개들의 공격을 받을때 호수에서 악어가 그를 구해주자 악어 신 소벸(Sobek)을 위하여 “세뎃의 도시”를 세운다. 소벸 악어신을 위한 신앙심과 신전은 그레코로망시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주 신전에 모셔둔 성스러운 악어는 헤로도투스(Herodotus)와 스타라보(Strabo)가 목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대시절 페이윰은 대부분이 늪지대였으나 기원전 2000년, 암네마흐트 1세(Amenemhat I)가 홍수를 내어 뫼리스(Moeris) 강을 확장하였으며 기원전 19세기말즘 암네마흐트 3세가 거상, 신전과 거대한 미로 그리고 나일 계곡 외곽의 유일한 피라미드를 지었다. 기원전 1,500년즘에는 세노우스렡 1세(Senwosret I)가 오벨리스크를, 세노우스렡 3세가 피라미드를 추가로 지었다.
이후 페이윰에 대한 관심은 저조하다가 기원전 300여년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뫼리스의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다 약 1,500 제곱 키로미터의 녹지대를 만드는 것을 계기로 도시가 활성화 되었다.
기름진 땅과 동 시대 유대인, 페르시아인, 아랍, 시리안, 사마리탄을 비롯한 식민자들의 노동 및 신기술로 인해 페이윰은 “이집트 동산”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물 추진 싸야(saqya) 기술은 아직도 페이윰의 볼거리 중 하나다.
서기 300년말즘부터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Byzantium)의 통치하에 포함되어 이집트의 종교는 기독교였다가 640여년 아랍인들의 공격으로 인해 다시 종교가 바뀌게된다.
페이윰은 아랍 군대에게 몰락한 마지막 도시중 하나로서 비잔틴군의 주둔지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랍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페이윰을 포함한 이집트내 비잔틴 통치는 막을 내리고 이후 페이윰은 긴세월 동안 튜니스, 시리아, 터키, 프랑스 등 외부의 침략과 부패한 통치자들, 잘못된 관리 및 경제 침체로 인해 역경을 거친다.
여러 지배자들과 통치자들을 거친 후 페이윰은 나일계곡과 연결된 철도로 인하여 경제가 발전되기 시작하며 20세기초 영국의 도로 건설 및 수로체계 개선덕에 로마시절때부터 겪었던 슬럼프에서 벗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