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이화원에 비하여 또다른 여름별궁인 원명원을 찾는 한국인 여행객은 그리 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화원보다는 원명원이 더 인상적인 곳으로
날씨가 따듯해지고 북경에 오셔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한번 쯤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 달마샨의 원명원에 대한 TIP>
원명원은 크게 서양루가 있는 장춘원, 원명원, 기춘원 이렇게 3개의 황실원림으로 구성된 청나라 강희제가
조성한 여름별궁이다. 강희제는 1690년 금나라와 원나라 통치자들이 여름별궁으로 사용했던 옛터에 장춘원을
조성하였고 1709년에 옹정황제가 된 아들 윤진을 위해 장춘원 북쪽에다 더 큰 여름별궁인 원명원을 지었다.
윤진은 옹정황제가 된후 일년의 3분의 2를 이곳에서 지낼정도로 원명원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강희,옹정, 함풍제에 이르기까지 6명의 황제중 가경과 함풍제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옹정과 도광제는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처럼 원명원은 황제가 기거하며 정사를 돌보았기 때문에 당대의 화려함은 자금성에 충분히 비견될만한 곳이었다.
원명원은 다시 말하면 중국 역사상 제2의 아방궁이자 유럽의 바로코,로코코 건축양식을 배합한 글로벌한 공원이었다
그안에는 가치를 헤아릴수 없는 대량의 문화재, 진귀한 보물과 서적등이 소장되어 있었지만 두차례 서양열강들의
침략으로 건물은 불타고 보물들은 약탈되어 대청제국의 황제들의 에덴동산이었던 원명원은 폐허로 남아 있다.
탐욕에 찌든 인간들에 의해 소실되어 폐허가 된 원명원은 인간사의 비극이며,
인류의 공동재산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와 인류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 최초의 인공분수였던 대수법..
1751년 건륭제 18년 가을에 준공되어 중국 건축역사상 일대 기적이었던 곳
서양루의 유적들을 보면 로마의 포로로마노 유적지들이 떠오른다...
다른점은 로마의 포로로마노 유적지는 시간의 흐름앞에 폐허로 변했다면
원명원의 서양루는 탐욕스러운 서구열강의 침략과 강탈로 인한 결과라는 점이다..
청나라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던 우리나라 구한말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중국정부에서도 그때의 치욕을 잊지말자고 다시 복원을 하지 않고 그때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화려했을 한때 여기도 물이 가득차있고 분수로 장식되어 있었으리라...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하던 고려말 길재선생의 시조가 절로 생각난다..
흥하고 망하고를 반복하는 인간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똑같은 적용된다

그 유명한 12지상의 동물의 입에서 분수가 뿜어나오던 해안당
2009년 약탈해간 쥐와 토끼상이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와 중국정부에서 프랑스정부 측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있었다. 해안당 앞의 시계분수공원에 세워진 머리는 12간지를 상징하는 12마리의 동물모양을 하고 몸은 인간형상을
하고 있었다. 상이 사실적이고 정교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시간마다 해당 동물의 입이 분수가 되도록 설계됐고 정오에는 12개 상 모두가 한꺼번에 물을 뿜었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상들은 황제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 아편전쟁 당시인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원명원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동물 머리상을 모두 잘라 약탈해 갔다. 이 중 소와 호랑이·돼지·원숭이상은 중국의 빠오리 기업에서 경매를 통해 되찾아
북경 동쓰스티아오역 D출구 바로 앞에 있는 빠오리예술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개와 닭·뱀·양 등 4개 상은 소재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영국,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자들...
남의 나라 유적과 보물들을 빼앗아 대영박물관이니 루브르박물관이니 하는곳에 자랑스럽게 전시해놓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그들이다.
병인양요때 프랑스에서 약탈해간 우리나라의 직지심경과 규장각도서도 떼제베 구입때에 우리나라에 돌려주네
어쩌네 하더니 아직까지 돌려주기 않고 그냥 생까고 있다... --;;

그전 화려했던 이곳의 모습을 새긴 책속의 동판화를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칠수밖에 없다.
중앙 분수의 양옆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이 영불 연합군이 떼어간 열 두 동물의 조각상이다
<달마샨의 원명원의 분수 TIP>
1747년 건륭제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였던 카스틸리오네가 보여준 유럽의 분수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그가 본 그림과 똑같은 유럽식 분수를 만들것을 명했다. 이 일은 수리학과 기계학,수학에 뛰어났던 프랑스
신부 브노아에게 맡겨졌고 이 분수와 어울리는 유럽식 궁전의 설계를 카스틸리오네에게 맡겼다.
건륭제는 왜 유럽식 분수의 건립에 열을 올렸던 것일까?
이전에는 중국에 분수를 만들어 낼 기술이 없었다.
신통력을 부린것도 아닌데 물이 솟구친다. 경이롭지 않을 수없다.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을 보고 건륭제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분수의 원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을 흘려보내 생기는 압력을 이용한 것이고
그래서 산이 많은 이탈리아에서 이 기술이 발달했다.

방외관은 작은 궁정이었다. 1760년 건륭제는 향비(지금의 신장 자치구에 해당하는 중앙아시아 야르칸트 족장의 미망인으로
청나라가 그곳을 점령하였을때 북경으로 압송되었다고 함)의 풍습을 존중하여 이곳에 정자를 이슬람사원으로 개보수하였다
향비는 매주 금요일 이곳에 와서 예배를 했고 건륭제는 궁중에서 이슬람교에 정통한 총기있는 시종 4명을 선발하여
향비를 모시게 하였다고 한다.


황화전.. 유럽의 미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중추절 날 밤에 황제는 미로의 중앙에 있는 둥근 정자에 앉아 있으면서 황색 명주로 만든 연꽃모양의 등을 손에 들고
가장 빨리 정자에 도착한 궁녀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미로의 입구에서 중앙의 정자까지 직경 30M가 넘지않지만 달밤에 환한 등불을 들고 상을 타겠다는 욕심에
궁녀들이 미로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 황제에게는 어둠속에 빛을 발하는 수많은 반딧불처럼 보였을것이다.

황화전 앞 분수
예전에는 여기에서도 물을 내뿜었을 것이다. 분수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조각상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양루를 둘러보면 지금은 석조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으나 아름다운 정원속에 화려한 건물과 호수와 다리, 화려한 분수
와 함께 문화와 예술과 자연을 사랑했던 청나라 황실의 옛 자취를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다.
저 연못속에 분수대에서도 그 시절 힘차게 물을 뿜어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