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블로그
[중국]  중국을 알고 여행합시다(2)
작성자 : 백두산  작성일 : 2009-02-16  조회 : 2568

  •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 끝에 BC 202년에 한나라(漢)의 고조(高祖) 유방은 숙적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통일된 왕조를 세웠다. 진(秦)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 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을 실시했다. 한나라(漢) 시대에는 유교를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고, 종이와 지진계를 발명하는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 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제(武帝)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 9년 왕 망(王莽)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왕망은 신(新)왕조를 건설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3년 반란군에게 피살됨으로서 신 왕조도 단명을 기록하며 멸망했다.

    왕망(王莽)에게 빼앗긴 한나라(漢)를 부흥하려는 하남(河南)의 호족(豪族)들에게 추대된 유수 (劉秀 - 光武帝)는, 기원 25년에 전국을 평정하고,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했다. 보통 이 때 생성된 한(漢)을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하고, 한고조에 의해 건국된 한나라(漢)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라고 부른다. 후한 말년 환관(宦官)이 득세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184년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고 위(魏), 촉(蜀), 오(吳)로 천하가 삼분된, 220년 조조(曹操) 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완전 멸망했다.

    이 후 약 45년간 조조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 손권(孫權)의 오(吳)나라가 대립하는 삼 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가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263년 위에 의해 촉이 멸망하고 280년 진(晋)의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오가 멸망하면서 삼국시대가 끝이나고 진나라(晋)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제권(帝權)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의 왕들에게 병력을 가지게 한 일은 이민족의 침입을 부른 결과가 되었 다. 316년에 진나라(晋)는 흉노(匈奴)에게 망하게 되지만, 진나라의 일족으로 강남을 다스리 고 있던 사마예(司馬睿)는 호족(豪族)의 지지를 받아 진왕조(晋王朝)를 재건했다. 전자를 서 진(西晋)이라 하고 후자를 동진(東晋)이라 한다. 서진은 4명의 황제에 의해 52년간 지속됐 고, 동진은 송(宋)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되기까지 11명의 황제에 의해 104년간 지속됐다.

    기원 420년, 동진(東晋)의 뒤를 이어 송나라(宋)가 서서 남조(南朝)가 시작됐다. 송(宋)을 이 어 제(齊), 양(梁), 후량(後梁), 진(陳)나라 잇따라 섰고 멸망했다. 한편 강북에는 서진(西晋)이 흉노에게 멸망한 뒤 북위(北魏)가 통일을 시켰다.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뒤 북제(北齊)가 동위를 대신하고 북주(北周)가 서위를 대신하며, 다시 북주가 북제를 멸하 는 혼란이 연속됐다. 581년 수나라(隨)가 북주를 멸망시키고 589년에는 진(陳)도 멸망시켜서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끝이 나게 된다.

    581년, 북주의 재상 양견(楊堅)이 외척(外戚)으로서의 힘을 이용하여 제위에 올랐다. 589년 에는 진(陳)을 멸하면서 전국을 통일했는데, 영토는 동남으로 바다에 접하고, 서쪽으로 신강 동부, 서남으로 운남•광서 및 월남 북부, 동북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렀다. 수의 두번째 황 제인 수양제(隨煬帝)는 605년부터 6년 동안에 걸쳐, 통제거(通濟渠)•한구•영제거(永濟渠)• 강남하(江南河)등 대륙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건설했다. 수나라는 대대적인 토 목공사와 3차례의 고구려 징발 등 무리한 정치를 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민심의 이반 과 불평분자의 봉기를 초래하여, 통일 후 겨우 30년만에 멸망했다.


    당(唐)은 617년 태원(太原)의 유수(留守)인 이연(李淵: 唐 高宗)이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 격하여 이듬해 수를 멸망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건국한 국가이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돌궐, 철륵(鐵勒), 투르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 들을 설치하는 등 사방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중앙의 통치력이 점점 쇠미해지면서 환관이 전권을 쥐었으며, 붕당의 투쟁이 계속됐다. 874년 황소(黃巢)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 폭발하여 중앙의 집권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결국 907년 에 후량(後粱)을 세운 주온(朱溫: 朱全忠)에 의해 멸망했다.

    당(唐)의 역사 가운데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 武后)이다. 그녀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하여 고종(高宗)과 깊은 관계를 맺은 뒤에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고종이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섭정을 통해 강력한 통치력을 과시했다. 그녀는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 까지도 독살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비 록 많은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무후가 추진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 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나라의 문학 방면에서는 `당시(唐詩)` 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시가 흥성했고,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 유명한 시인을 배출했다. 당대에 들어와 불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서유기`의 모델인 현장(玄奬), 삼장법사(三藏法師) 등이 유명하다. 특히, 통일신라와의 교역과 교류는 극히 활발하였으며 많은 승려와 학자들이 당을 내왕했는데 신라인의 집단거류지인 신라방 (新羅坊)에는 거대한 사찰도 있었다고 한다.

    907년에서 960년까지는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대의 54년 동안 황하 의 유역에는 양(梁)•당(唐)•진(晋)•한(漢)•주(周) 등 명이 짧은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망했 다. 또 지방에서는 전후 14개의 여러 나라가 역시 일어났다가는 이내 망했는데, 그 가운데 서 가장 강대한 것이 북한(北漢),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민, 전촉 (前蜀), 후촉(後蜀), 형남(荊南)의 열나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라 고 한다.
    960년에 오대(五代) 마지막 나라 주(周)의 중신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장병들에게 추대되 어 송나라(宋)를 세워서, 다음 태종(太宗)의 대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관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와 외교상의 폐해가 누적되 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기지 않 을 수 없었다. 보통 이 때까지의 송을 북송(北宋)이라고 칭한다. 북송이 금에 멸망한 후 강 왕(康王) 조구(趙構)는 유민과 군대를 이끌고 남방으로 내려가 황제로 즉위했다. 도읍은 남 경(南京: 하남성 商丘)에 정했다가 임안(臨安:杭州)으로 옮겼다. 역사에서 이를 남송(南宋)이 라 한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에 의해 멸망당했다.

    송(宋)은 유교에 근본한 문관우위의 체제를 통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을 구축했고 복수합의 제를 채택하여 권력의 관료집중화를 억제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상주의적 학설인 신 유교주의 곧 송학(宋學)이 성립했다. 그 중에서도 주자는 북송이래 이학을 집대성하고 객관 적 유심주의 사상체계를 정리했는데 그의 학설은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종(神宗) 때에 등용된 왕안석(王安石)은 차례로 부국강병의 새 법을 시행했으나, 보수파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켜 실패하고 말았다. 송은 문(文)을 숭상했기 때문에 서화(書畵), 시문(詩文), 불교 (佛敎), 유학(儒學) 등 문화면의 발전도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쿠빌라이는 도읍을 대도(大都: 北京)에 정하고 국호를 원(元)이라 정했다. 1279년에 남송을 멸하고 전국을 통일했다. 그들은 아시아 대륙뿐만 아니라 중동은 물론 동부유럽을 석권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중국의 문화•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 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 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몽고족,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남방인(南 方人)을 엄격히 구별하고 몽고인과 색목인이 정치를 관장했다. 그러나 원의 지나친 확장과 인종차별은 각지의 민중봉기를 필연적으로 유발시켰으며 마침내는 주원장(朱元璋)이 한족의 단결을 호소, 대도를 점령하고 명(明)나라를 건국함에 따라 원나라는 멸망했다.

    원은 중국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대외외교를 펼친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서방과의 교류가 이 때부터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문화가 서방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상인 및 시민계급의 지위가 향상됐다. 납세제도에서도 당 제(唐制)를 본받아 지세•정세•상세 등을 정했으나 재무행정의 실무를 주로 서역인과 한인 에게 맡겼던 까닭으로 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서 부정부폐가 심하게 되었다. 결국 몽골족은 힘(力)으로는 한족을 지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족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 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멸망하게 됐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