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블로그
[중국]  중국을 알고 여행합시다(3)
작성자 : 백두산  작성일 : 2009-02-19  조회 : 2064
  • 명(明)은 원(元)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 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 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명 태조는 전지측량과 호구조사를 실시하 고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는 등 농업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3대 성조 이후 기강 이 문란해지고 관료의 당쟁과 환관의 전횡이 심했다. 15세기에는 서몽고의 오이라트가 침입 했고, 토목(土木)의 변(變)에 이어 타타르의 침입으로 국세가 심히 위축됐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한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淸)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명 (明)나라는 멸망했다. 왕조의 잔여 세력이 장강(長江 : 양자강) 이남에서 전후로 복(福), 당 (唐), 노(魯), 계(桂) 등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를 남명(南明)이라고도 한다.

    명조의 관제를 보면 중앙은 원(元)제국의 정치체제를 모방하여 중서성(中書省)과 6부를 설치 했으며, 지방제도는 전국을 15성에 구분하여 각성에 재정기관인 승선포정사(承宣布政司)와 사법기관인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를 설치하여 각각 소관업무를 맡도록하고 때에 따라서 임시로 총독 혹은 순무(巡撫)를 파견하여 군사와 민정을 독려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각성 을 다시 부(府)•주(州)•현(縣)의 순위를 구분하고 지부•지부•지현을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관리토록 했다. 학문적으로는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양명학(陽明學)이 많은 지지를 받았 다. 원대의 문학은 희곡(戱 )이 발달한 반면 명대에는 소설(小說)이나 문학비평(文學批評)이 사회 전반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황관의 횡포와 함께 명조(明朝)의 몰락에 박차를 가한 것은 당파의 분쟁이었다. 처음에는 환 관에 대항하여 설립됐으나 당쟁이 심해짐에 따라 타 당을 음해하는데 많은 국력을 낭비하여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지배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주족은 국호를 청(淸)이라 명하 고 1644년에 중국을 점령하므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됐다. 청의 만주 족은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한족을 강압, 자기네 풍속인 변발 등을 강요하는 등 한 족과의 사에에 불화가 계속됐으나 성조(聖祖: 康熙帝), 세종(世宗: 雍正帝), 고종(高宗: 건룡 제)으로 이어지는 1660∼1800년의 130여년간, 훌륭한 통치를 보여 당시 중국에 있었던 예 수교 선교사에 의해 그 내용이 유럽에도 소개됐고 이 때에 정비된 관료제도가 프랑스에 영 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 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아편전쟁(1839∼ 1842)•태평천국운동(1851∼1864)•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 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결국 1911년 손문(孫文) 일 파의 혁명당에 의해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청나라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하게 된 청(淸)제국은 초기에는 명말(明末)의 혼란한 사회상 이 여전히 지속됐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후 통일제국으로서의 긴반을 확고히 다지고 혼란한 사회를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관제는 명조(明朝)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내각과 8부를 설치했으며 정부의 여러 관직에 원(元)대와는 달리 만주인뿐만 아니라 한인(漢人)도 등용하는 비교적 관대한 인사정책을 실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문호 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이 마침내 `양이(洋夷)`에게 굴복하고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학문적으로는 경서(經書)의 문헌학적인 비판을 통하여 사실의 진위 (眞僞)를 밝히는 시에 문자의 시대적인 의미를 증명함으로써 경서 본래의 원의(原義)를 올바 르게 이해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널리 발전했다. 이러한 고증학의 영향은 다른 분야에도 파 급되어 역사학•금석학•교감학(校勘學) 등의 고증적 방법에 의한 연구를 구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두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호사건)으로 서 양강국의 굴욕적인 문호개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청조(淸朝)는 태평천국운동 (太平天國運動)이나 자강운동(自强運動)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내부의 권력투쟁 과 이념의 변질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1884년 청불전쟁(淸佛戰爭), 1894년 청일 전쟁(淸日戰爭)에서의 패배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빼앗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 후에도 청조 (淸朝)는 꺼져가는 왕조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나 입헌운동 (立憲運動) 등의 개혁운동을 추진했지만 서양열강의 압력과 청조(淸朝)의 독선적인 방법으로 말미암아 개혁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1911년 민영철도를 국유화하여 제국주의 열강에게 매각하려는 청정(淸廷)의 기도를 분쇄하 기 위해 일어났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불씨는 무창(武昌)에서 혁명파가 청군을 대파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손문(孫文)은 혁명정부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임시대통령(臨時大 統領)에 취임하고 이 해를 민국 원년으로 하였으며, 수도를 남경(南京)에 두었다. 그해 2월 손문은 황제 퇴위와 내각책임제 실시, 남경에서의 취임 등을 조건으로 청정부의 내각총리대 신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으며,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원세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하게 됨에 따라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조(淸朝)는 268년만에 멸망하고 중국 최초 의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청말 이래 중국경제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개혁정책의 부진, 서양열강의 침투로 인해 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도시지역에서는 1919년 이후 민간자본이 점차 성장하고, 토 지자본이 상공업과 금융업에 투자되어 발전이 촉진됐으나 농촌경제는 파탄일로였고, 농촌인 구의 도시유입, 국내외 정치의 불안 등으로 중국사회는 혼미를 거듭했다. 더군다나 원세개 (袁世凱)는 열강을 배후에 업고 제국의 부활을 꾀했으며, 원세개가 죽은 뒤에는 군벌(軍閥) 들이 열강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각지에서 할거했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경제적 모든 측면은 서양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이 당시의 모든 중국의 이권은 서양열강이 차지하고 중국은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동양의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민중의 자각은 크게 깨어있어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학생의 주도로 일어난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애국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대전 후 파리강화회담에서, 일본이 과거 독일이 청조로부터 할양받은 산동지역의 권리를 양도받기로 합의한 것에 북경 대학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임으로써 시작됐다. 북경정부는 학생구속과 탄압으로 이 운 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전국의 노동자, 상인계층이 가세하면서 결국 정부는 친일파 각료를 해직하고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5•4운동의 성공은 중국민의 잠재 력을 깨워주는 기폭제의 역할외에도 중국내에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 한 셈이 된 것이다.

    5•4운동은 중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 국내의 군벌(軍閥)과 세계열강제국주의라는 것을 중국민중에게 분명하게 폭로했다. 5•4운동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인 성장을 인식한 선진 상인 지식인•노동자가 철저한 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중 국에 실행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1년 7월 1일 드디어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원조를 얻어서 중국공산당 제 1기 전국대표대회(全國代表大會) 가 치외법권 지대인 상해의 프랑스조계내(租界內) 여학교에서 개최했다. 이후 중국공산당(中 國共産黨)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과 2차에 걸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게 되지만 근본 적인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게 된다.

    제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은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꾀하는 것이 유리한다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손문의 광동정부로서도 북벌 (北伐)에 의한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인 당조직이 필요한 상황 이었다. 그러나 국민당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증대됨에 따라 양측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의 상해 쿠데타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고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28년 10월 북벌의 완성으로 남경을 수도로 한 국민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됨으로써 이른바 `남경시대(南京時代 : 1928∼1937)`가 개막됐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 사이에 다섯차례에 걸친 위 초(圍剿)라고 부른 포위공격전을 감행했다. 결국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역사적인 대장 정(大長征)을 감행하여 소련에 가깝고 또 일본의 침략에 가까운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9∼10만 주력부대가 6천 마일의 대행군을 계속한 끝에 겨우 7∼8천 명이 생존하여 남경정부의 전중국지배의 길을 열어 주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단결 강화와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높여주었고, 행군 과정에서 각지에 혁명의 씨가 뿌려짐 으로써 후일 공산당의 집권을 위한 기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약화와 분열을 틈타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 후 일본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상해와 열하(熱河)까지 진군했다. 이에 중국내에서는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장개석은 국내를 안정시킨 다음에 외적 을 진압한다는 소위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주장하면서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해기 때문에 학 생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항일을 주장한 중국공산당측은 폭넓은 동조를 받았다. 국민정부내에서도 장개석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 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장개석의 부하중 몇명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다. 이 사건이 서 안사건(西安事件)으로 이 후 국민당이 중국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는 제 2차 국공합작(國共 合作)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항전보다는 당 세력을 확장하는 데 염두을 두었기 때문에 항일전쟁과 국공간의 교전이 병행되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 며, 결국 1944년 5월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나자 중국은 통일국가의 건설이 가장 중대한 과제 로 등장했다. 전쟁 직후에는 장개석정부가 미국의 원조 덕분으로 공산당보다는 훨씬 더 유 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군의 유격전과 정치공작, 국민당의 내분과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부재, 인플레로 인한 군 사기의 저하 등은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어주고 1949년 대만으로 달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침내 주석으로 선출된 모택동(毛澤 東)은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