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은 세계일주여행은 18~19세기 영국의 ‘그랜드투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변방으로 여겨졌는데 영국의 귀족층들이 교양있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로마나 파리 여행을 통하여 에티켓과 문화예술적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행은 러시아로 까지 영향을 미쳐서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귀족들은 나라와 관계없이 모두 비슷한 교양수준을 유지했다고 한다. 귀족층이 여행을 갈 때는 보통 하인을 대동하였으며, 교통기관과 숙박시설이 발전하지 않은 그 시대의 여행은 매우 긴 일정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비용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실락원으로 유명한 존밀턴 또한 그랜드투어에 참여했던 인사이다. 물론 그는 그랜드투어가 유행하던 때보다 이른 17세기 사람이지만 이른바 그랜드투어의 초기 참여자라 할 수 있다. 그가 1년 3개월 동안 유럽여행을 하는데 든 비용을 오늘날로 따지면 중견급 간부 연봉의 1.5배 정도 되는 돈이었다 한다. 밀턴은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행의 목적은 본국에서 배운 지식을 해외에서 체험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행지의 가장 유명한 인물을 만나 교류하여 자신의 지식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 밀턴이 여행을 떠날 당시 그는 유럽에서 떠오르는 시인이어서 이러한 목적을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노학자 갈릴레이가 바로 그가 그랜드투어시 만난 사람중 하나이다.
여행을 단순히 외국의 풍경을 감상하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요즘, 밀턴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새로워지고 견문이 넓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은 잘 만든 영화 한편 보는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감흥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유명한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나 감흥은 여행객의 삶에 녹아서 자신을 계발하는 영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밀턴은 갈릴레이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 덕분에 그 당시 영국에서 일어났던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다 한다. 청교도인 그는 신앙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 의회파 편에 서서 싸우기로 한 것이다.
여행이 오늘날 같이 대중화된 때에라도, 여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17세기 그랜드 투어 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인사를 만날 수도 없고, 더욱이 학문적 교류를 한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일반 여행객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일제시대 김교신은 지리 수업 시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역 최대의 특산물은 인물이라고. 그 지역과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유명한 인물이 누구인가 알고, 그 인물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된다면 밀턴이 주장한 여행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푸쉬킨, 도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로스트로포비치, 피터대제, 유리 가가린, 멘델예에프, 레닌, 고르바초프 등등, 러시아에는 한국사람과 친숙한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들이 많이 있다. 인류역사 발전에 기여한 이러한 인물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러시아 여행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을까? 각 지역을 다 돌면서 풍경은 보지만 인물을 읽지 못하고 간다면 그것은 싸구려 여행, 비실용적 여행이랄 수 밖에 없다.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간에 그 지역의 인물들을 알고, 그 인물이 이룬 업적들을 상고할 때에, 단순한 견학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개별여행이 대세라고 한다. 그리고 개별여행객들을 위한 가이드 서비스 사업도 번창하고 있다. 그 가이드들이 내세우는 표어는 이른바 ‘지식 가이드’ 이다. 풍경 사진 찍기와 쇼핑, 옵션투어를 잘 하는 것도 물론 여행의 한분야 이겠지만, ‘지식’을 표방한 투어는 분명 진일보한 여행서비스라고 사료된다.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돈많고 지체높은 사람들만 누렸던 그랜드 유럽 투어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1. 밀턴 평전, 박상익 저 2008
2. 김교신 전집, 노평구 엮음 2001
3. 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 윌리엄 L.랭어 엮음/박상익 옮김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