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이보다 더 아버지의 사랑을 잘 나타낸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렘브란트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드러낸 이 이야기를 한장의 화폭에 담아냈다. 이 한 장면으로서 기독교의 오의를 나타내었으니 과연 위대한 화가가 아닐 수 없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수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돌아온 탕자’ 또는 ‘탕자의 귀환’이라고 하는 이 작품만큼 사랑받는 것도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유지되는 힘이야 말로 사랑에 기초한다는 것을 조용하지만 힘차게 표현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막내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 요청한다. 유산이란 죽은 후에 나누어 주는 것인데, 이를 요청하였으니 참으로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며칠이 못되어 유산을 나눠 받은 둘째 아들은 먼 타향으로 떠나 그곳에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 버리고 만다. 마침 그곳에 흉년이 들어 둘째 아들은 먹을 것이 없어 그 지방 사람들의 종이 되고, 돼지치는 일을 한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끼니를 연명하고자 하였지만, 이조차 주는 사람이 없다. 그는 한탄한다.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 조차도 배불리 먹지 않았던가? 비로소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버지가 먼저 멀리서 오는 작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작은 아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데, 아버지는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하인들을 시켜서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발에 신을 신기라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베푼다.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이 무슨 일인가 하인에게 묻는다. 죽은 줄 알았던 둘째 아들이 살아돌아와 주인이 잔치를 베푼다 하자, 맏아들은 분노하여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수고하였어도 잔치 한번 베푸신 적이 없는데,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말아먹은 동생을 위하여 이런 큰 잔치를 베푸심은 어찜이니이까’ 아버지가 대답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다시 화면으로 돌아와 보자. 성경의 내용대로, 남루한 옷을 걸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어 무릎꿇어 용서를 빌고 있고, 아버지는 이런 둘째 아들의 양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분노한 맏아들이 동생을 무섭게 주시하고 있다.
명암법을 즐겨 사용하는 렘브란트는 주인공들을 밝게 하고, 그 외의 배경과 주변인물들을 어둡게 함으로써, 주제를 알기 쉽게 드러낸다. 돌아온 탕자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은 알아 맞춰 보시라. 그림에서 가장 밝게 표현된 부분은 어디인지? 아버지의 얼굴과 맏아들의 얼굴이다. 맏아들의 얼굴은 모든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 붓는 강렬한 인상이다. 맏아들은 가문의 흥망성쇠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었다. 혹여라도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될까 하여 행동도 조심하고, 밭에 나가서는 게으르지 않게 맡은 바 과업에 충실하였다. 그로 인하여 가문은 번창하였고, 그러한 일을 이룬 맏아들은 모든 이들의 칭찬의 대상이었다. 부정이 만연한 세상에서 그처럼 바르고 곧게 사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치 조선시대의 강직한 선비처럼 그는 가히 경외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런 맏아들에게 늙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한 동생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형의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바르고 곧은 것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맏아들은 바르고 곧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고 높다1). 바른 아들과 허랑방탕한 아들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바르게 사는 큰 아들만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허랑방탕하였어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자까지도 아끼는 분이다. 큰아들의 ‘의’를 뛰어 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 이다.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론 ‘의’가 필요하다. 법과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면 세상은 살벌할 것이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누구나 허물이 있다. 그런 허물을 누군가가 보듬어주지 않으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 신적 사랑이 있다. 의와 불의를 뛰어 넘어 더 높은 자리에서 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2).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우화를 통해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세상은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늙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표정에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맏아들과 아버지의 표정을 대비시킴으로써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라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었다.
[참고문헌]
1. 人道와 神道, 김교신 전집 2001, 성서조선 제 71호, 김교신
http://www.biblekorea.net/board_spec/viewbody_search.php?code=board_biblekorea_articles&page=1&number=324&keyfield=comment&key=%C5%C1%C0%DA&oldnew=new
2. 넷째판에 붙이는 말,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3. 에르미타쥐 박물관 홈페이지 : http://www.hermitage.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