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기독교인들이 매주 예배시작과 함께 외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다. 오늘 그림의 주인공 본디오 빌라도는 이렇게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매주 기독교 신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본디오 빌라도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 경위를 찬찬히 살펴 볼진대, 예수는 누가 죽인 것이 아니다. 예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우리는 이 빌라도를 통해서, 진리를 알되 실천할 용기가 없는 자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다분히 비아냥 섞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를 논하는 많은 경전과 철학서들이 있지만, 오늘 게 니콜라이의 그림에서, 그가 전하고 싶어했던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그림은 게 니콜라이가 은퇴한 후에 그린 그림으로서, 그의 생애에 많은 훌륭한 그림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이 그림이 처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하였을 때에 대중들은 그림에 열광했다고 한다. 어떤 신부는 정통성을 벗어난 그림이라 하여 화가를 형벌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한다. 사태가 심각해 지자 러시아 정부는 그림 관람을 금지시키고, 해외로 추방하였다. 러시아에서 추방된 이 그림은 독일 연방에 전시되어 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는데, 함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이 그림이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4,000루블을 모아 다시 함부르크로 가져 오려 하였다 한다. 이로 볼 때에, 그가 민중들에게 끼친 감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일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때라도 만일 거지가 들어와서 그 상처를 싸매 주기를 내게 간청하거나, 또는 맹인이 나더러 이웃 마을까지 인도해 주기를 부탁한다면 나는 당장 그림 그리던 붓을 내던지고 온 힘을 기울여 내 동포의 간청에 응할 것이다’1)
그는 뜨거운 동정심의 소유자로서,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이렇게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게 니콜라이가 전하고 싶었던 ‘진리’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가 말하는 진리는 교회당의 화려한 강대상에서 말하여지는 설교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진리는 사회의 밑바닥까지 내려와 그들과 함께 하는 삶에 있었다. 구원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전체의 구원이었기에, 헌금하는 것으로 자신이 행할 진리를 교회에 떠 맡겨버리는 비겁한 삶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그들과 함께 하며 사회악과 싸우는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삶에 있다고 믿었다. 개인의 구원보다 동포 전체의 구원을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게 니콜라이의 그림에는 이런 그의 삶이 녹아 있다.
그림을 보자. 예수의 모습은 전통적인 예수의 모습과는 다르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를 지나치게 고난 받는 모습으로 과장하여, 비쩍 마르고, 많은 피를 흘리며, 머리에는 후광이 있는, 고난당하는 성자의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아주 신격화 되어서, 온화한 얼굴에, 머리는 빗질한 웨이브 파마를 하였고, 후광은 없어졌지만 고대 그리이스 로마 시대의 신들의 영향으로 건장한 체구의 조각같은 미남으로 그려졌었다. 지나치게 고난받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신격화된 것이나 모두 진리를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 게 니꼴라이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신성은 과장된 그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림에서 예수는 평범한 유대 청년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름한 옷을 걸쳤고, 머리는 흐트러졌으며, 수염은 깍지 않았다. 우리가 흠모할 만한 구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눈에는 모든 것을 꿰뚫을 만한 힘이 있다.
반면 세속적인 빌라도는 로마식의 화려한 의상, 깔끔하게 깎은 머리, 기름기가 흐르는 통통한 체구로서 누가 봐도 지체높은 귀족이나 정치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며 귀찮다는 듯이 자리를 뜨려는 모습에서는 진리가 하찮게 버려지는 듯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모든 우주의 해답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라지려 하는 빌라도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본다. 빌라도는 말한다. ‘나에게는 너를 살릴 권한도 죽일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는데, 네가 말하는 진리가 너를 구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권력이 곧 진리 아니냐는 것이다. 이 비대한 빌라도의 모습에서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과연 예수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어떻게 볼까? 대형 세단을 타고 교회로 와서, 주일 예배 설교하는 것으로 성직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을 좋게 볼까? 예수는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이름있는 크리스찬 기업가는 어찌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그토록 업신여길까? 예수는 힘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였는데, 왜 어떤 목사들은 그토록 권력지향적일까? 그들에게 진리는 ‘돈’인 것 같다. 돈만 있으면, 만명, 오만명 모이는 교회당을 지을 수 있고, 십일조만 내면, 세계 어느 오지라도 선교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게 착취하고 쥐어 짜서 만든 물질로 선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할까?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도록 방조하면서 나는 죄없다 하고 손 씻는 빌라도와 다를 바 없다. 진리란 오늘 그림의 예수처럼 소박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어서 쉽게 찾아 지지 않는다. 반면 빌라도와 같은 화려한 모습에서 쉽게 발견한 진리는, 실은 진리가 아니다. 게 니콜라이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허름한 예수가 진리냐, 기름진 빌라도가 진리냐?
게 니콜라이는 일련의 종교회화를 통하여 진리란 민중과 함께 하며, 사회악과 싸우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자신이 만년에 러시아 남부의 시골로 내려가 화가로서의 명성을 모두 버린 채 농사지어 먹는 삶을 살았다 한다. 게 니콜라이의 그림이 위대한 것은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그의 삶이 더 크게 우리 마음에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 문헌]
1. 니콜라이 게, 우찌무라 간죠 전집, 제 9권, p.451, 우찌무라 간죠 지음, 크리스찬 서적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