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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작성자 : 이현희  작성일 : 2008-02-27  조회 : 2067
  •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다’ 라고 하였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표현이겠지만, 나에게는 ‘영화는 찍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는 것이다’ 라는 뜻으로 읽혀진다. 화면에 담기는 영상은 현실세계의 많은 현상 중에서 특히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선택, 촬영되어 보여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라는 역사책의 사관(史觀) 편에서 ‘역사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풀이라 함이 옳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란 객관적인 유일무이의 단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그 동안 있어왔던 많은 사실, 사건 중에서 어떤 역사가에 의해서 취사, 선택되어 해석된 결과라는 뜻이다. 만약 모든 사실을 다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그 기록된 책을 이 지구 위에 다 쌓아도 모자를 것이며, 그렇게 해봐야 의미도 없다. 역사란 보는 사람의 관점, 즉 사관(史觀)이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똑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논리를 그림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성일씨의 표현을 그림에 빌어 본다면, ‘그림은 붓으로 그린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은 붓가는 대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정물화이든, 풍경화이든, 인물화이든 간에 그 그림은 붓을 쥐고 있는 화가가 그린 것이다. 화가의 의도가 그림에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일단 그려진 그림은 화가의 손을 떠난 대중의 것이라고 하여, 전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보는 사람의 감상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쪽 면만을 얘기한 것이다. 그렇게만 그림을 본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다. 화가는 한 개인이지만, 인류 역사의 산물로서 오늘 있게 된 개인이다. 따라서 어떤 그림, 특히 역사적으로 위대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림들은 한 개인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화가와 그가 처한 시대를 모르고 그림을 보는 것은 마치 값비싼 선물을 받고도 그 선물을 누가 주었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카소의 ‘부채를 든 여인’을 보자. 이 그림은 1907년 작품이다. 1907년은 입체파의 효시라고 하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등장한 해인데, 이 해를 기점으로 많은 입체파 작품들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고, ‘부채를 든 여인’도 그중 하나이다. 마치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 신체가 불균형을 이루고, 인물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탈을 쓴 것 같고, 원근법이 채용되지 않은, 전통적인 ‘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그림이다. 이전까지 서구미술은 르네상스시대에 원근법의 발견 이후 비례, 대칭, 조화와 같은 수학적 토대 위에 객관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겨왔다. 그것이 피카소에 의해서 파괴된 것이다. 그러면 피카소는 이전까지의 전통을 부정하고, 왜 이런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 이는 그 시대에 대한 설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말을 빌면, 그 시대는 제국주의의 발달과 식민화 정책, 열강의 대립, 계급 갈등, 혁명과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 등, 소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서구 문명이 마침내 파멸의 위기에 섰었다. ‘이비뇽의 아가씨들’이 그려지고 7년 뒤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이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들은 유럽인이 쌓아온 과학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서양문명이야 말로 그들이 멸시해 마지않던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문명보다 더 야만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에 대해서 깊은 불신과 회의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뜻을 간파하여 분출한 예술가가 바로 피카소이다.

    일전에 ‘아브라함의 희생’의 화가 렘브란트에 대해서 이야기한적이 있다. 이 그림이 위대한 것은 바로 렘브란트 그 자신이 미세한 하늘의 뜻을 깨닫고 그림으로 표현한 데에 있다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천재성은 그 시대의 사람 누구나 처한 환경임에도 오직 그만이 시대의 뜻을 표현한 데에 있는 것이다. 피카소가 위대한 것은 그의 그림이 잘 되었다기 보다는, 시대의 뜻을 선구적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시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술가 개인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뜻을 간파하여 표현해 내는 능력은 오직 천재에게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 그림을 ‘본다’는 행위는 아주 쉬운 일이지만, ‘보는 눈’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보는 눈’을 가질 수만 있다면 시대를 초월하여 명롱한 밤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위대한 작품들을 더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보는 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만은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가와 그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본다. 위대한 작가와 그림은 항상 우리에 앞서서 그 시대를 이야기 하여 무지를 일깨웠기에 우리가 찬탄해 마지 않는 것이리라.

    [참고문헌]
    씨네21, 2007. 6월호
    뜻으로 본 한국역사, 2002
    노성두 이주헌의 명화읽기, 1998
    에르미타쥐 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hermitage.ru,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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