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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역]  중부유럽 체코여행 – 신성로마 제국의 꽃 프라하 탄생 이야기
작성자 : 한재철  작성일 : 2024-12-25  조회 :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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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나라에서 동유럽으로 부르는 지역은 냉전시대 공산권과 자유지역을 나누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남아 있다. 지리적으로는 유럽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슬라브, 그리스, 비잔티움, 동방 정교회 및 오스만 투르크 문화가 교류하며 중세시대 유럽문화를 주도하던 지역이었다.

     

    게르만족 남진으로 시작된 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럽 여러 나라 역사 시작되었다. 라인강 지역에서 출발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smagne)가 로마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로마 황제(800년)"로 대관식을 치르며 유럽을 주도하게되었다. 현재 동프랑크 독일 게르만 작센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오토 1세가 로마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96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며 1806년 나폴레옹의 압박으로 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 황제가 공식적으로 제국 황제 지위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되기 까지 800년간 신성로마제국이 유럽을 주도적으로 관리했다.

     


     

    중부유럽에서도 가장 중앙에 자리한 체코는 건국설화에 따르면 농부 였던 농부 프셰미슬 오라치(Přemysl the Ploughman)와 아내 리부셰(Libuše)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9세기말 공국의 형태를 갖춘 프셰미슬 왕조의 바츨라프 1세(성 바츨라프)재위 1230년 ~1253년 사이 크리스트교를 체코 사회통합 종교로 선택하고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사후 "성 바츨라프"로 성인이 되었다.

     

     

     


     

    총 길이 전장 약 435km의 블타바(Vltava) 또는 몰다우(Moldau)강으로 불리는 수운교역의 중심에 자리한 체코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없던 대공위 시대(1254~1273년)를 지나 1308년부터 1313년까지 신성 로마 황제 룩셈부르크 백작 헨리 7세의 아들 요한이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가진 프셰미슬 왕조의 공주 엘리슈카 프셰미슬로브나(Eliska Premyslovna)와 결혼 1310년 보헤미아의 왕위를 승계하며 체코는 공국에서 왕국의 지위로 격상되게 된다. 1296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난 요한 1세(John of Bohemia)는 뛰어난 지도력과 기사도 정신을 가졌던 왕으로 " 맹인왕 요한(John the Blind)"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요한은 점점 모든 시력을 잃었으나 "오늘 나는 왕으로서 전사할 것이다. 후퇴는 없다."는 말을 남기며 프랑스 동맹군으로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1337년 ~ 1453년) 초기 참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 1346년)에서 전사한다. 전투는 영국이 장궁병 (Longbowmen)을 활용하여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서유럽역사의 변곡점으로 후반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 1415년)를 통해 헨리 5세 (Henry V)가 역사적 주인공으로 본격 등장한다.

     


     

    맹인왕 요한의 아들로 어린 시절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며 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깊이 배우는 기회와 프랑스 왕실과의 깊은 인연속에 성장한 카를 4세(Charles IV, 1316년 ~ 1378년)는 1346년 아버지 사망후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받고 이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t VI)와 지지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1355년에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쳐 즉위했다. 정치적, 가문적, 그리고 외교적 배경과 라틴어, 독일어, 체코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은 카를 4세를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군주가 되었다.

     

    아버지 요한에 의해 체코 보헤미아는 유럽의 중요 왕국으로 발전하였으며 프라하를 유럽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대를 이어 보헤미아를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지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카를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후 1356년 제도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보장하는 7명의 세속 선제후 보헤미아 왕,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그리고 교회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금인칙서(Golden Bull)로 발표하여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카를교(Charles Bridge)는 황제의 명령으로 프라하를 제국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며 135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02년에 완공된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의 고딕 양식의 상징적인 다리로 점성술에 깊이 심취해 있던 카를의 영향으로 홀수 숫자(135797531)가 연속되는 날짜를 택해 1357년 7월 9일 오전 5시 31분에 다리의 첫 돌은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를 4세가 정치적 입지 강화하기 위해 여러 유럽 왕가와 맺은 결혼 동맹은 이후 복잡한 유럽역사에 자주등장한다. 그리고 프라하의 대표적 관광지 카를교에는 신성로마 제국과 보헤미아의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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