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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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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는 일본 전체 면적의 약 22%를 차지하는 약 83,450㎢로 대한민국의 80%가 넘는 넓이 이다. 곰(히구마)을 신성시하며, 곰 제사(이오만테, Iomante)를 지내던 원시 원주민은 아이누어를 사용하던 아이누(Ainu) 민족이었다. 메이유신(1868년)을 시작한 혼슈 정치집단은 1869년 7월 8일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가이타쿠시)를 삿포로에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홋카이도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1873년 홋카이도 개척사에 따르면, 당시 아이누 원주민은 약 16,272명이다. 홋카이도로 들어온 혼슈 개척사는 아이누 민족어 사용 금지, 전통 의식과 종교 행위 금지, 일본어 사용 강요, 일본식 성(姓) 부여 및 가족 제도의 강제 적용등을 통해 원주민들을 탄압 현재 홋카이도 인구 약 530만 명 속에서 아이누족의 전통문화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메이지유신을 시작하고 군국주의로 접어 들어가며 홋카이도의 넓은 땅은 1500년
가까운 오랜기간 육류섭취 금지로 왜소하게 변한 일본인들의 체격을 향상 시키기 위한 육제품 생산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판단되었다. 일본열도에는 불교가 전파되며 생명 존중 사상과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강조하는 육식 금지와 금욕적인 생활방식 고대 신토(神道) 신앙이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의 생활 규범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속 675년, 덴무 천황의 칙령으로 소, 말, 개, 닭등 동물의
고기 섭취를 오랜기간 금지하였습니다. 특히 에도 시대(1603년
~1868년)는 더욱 엄격하게 관리 하였으나 생선과 해산물은
금지하지 않아 수산물을 이용한 요리와 불교사찰에서 두부를 주재료로 하는 채식 쇼진요리(精進料理), 튀김요리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슴등은 산고기(山肉)로 불리며 약용으로 섭취하는 풍습은 있었다. 1872년 메이지 천왕 시기 “강한 체력과 건강"을 위한 쇠고기를 포함한 육류를 섭취를 공식적 허용하며 육류섭취 문화가 대중화되었습니다. 당시 규나베(牛鍋)로
불리는 소고기 전골 요리가 탄생했다.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가이타쿠시)를 삿포로에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메이지유신 일본은 혼슈 농민들에게 5만평 가량의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하는 이주 정책등으로 빠르게 외지인들의 숫자가 증가한다. 특히 도시 개발에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병참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미국 3대 농무부 장관 출신 호러스 캡론(Horace Capron, 1804년 8월 31일 ~ 1885년 2월 22일)를 1871년 ~1875년 3년간 고문으로 초빙 미국의 농업, 건축, 치안, 군사 기술 등을 참고하여 홋카이도 개발 밑그림을 완성한다.


또한
미국 매사추세츠주 애슐리 출신으로 매사추세츠 농업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지낸 농학자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년 7월 31일~1886년 3월 9일) 초청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学校)설립과 1876년 7월 ~ 1877년 4월 초대 교장을 맡겼다. 이 학교는 홋카이도 제국대학(北海道帝國大學)->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学)로 발전하며 일본 근대교육의 발판이 되었다. 클라크가 일본을 떠나며
남긴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경구는 일본 청년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지침이 되었다.



홋카이도의 개발로 목축업, 곡물 뿐만 아니라 유럽 호프 재배
지역과 유사한 기후로 일본 최초로 호프 재배가 시작되고 높은 품질의 호프를 생산되며 삿포로 맥주탄생의 기초가 마련 되었다.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가이타쿠시)에서 영국으로 밀항후 독일로 이주해 있다 아오키 슈조(青木 周藏, 1844년 3월 3일 ~ 1914년 2월 16일) 독일 공사의 조언으로 베를린 맥주 양조 회사에서 2년 2개월 동안 실습하며 양조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고 귀국한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
清兵衛, 1848년 2월 9일 ~ 1916년 4월 2일)를 초대 1877년에 첫 번째 "삿포로
맥주"를 출시했다.
개화기 미국, 일본, 조선
주요연표
1775년 4월 19일 ~ 1783년 9월 3일
미국독립전쟁
1853년 페리제독 쿠로후네 사건
1858년 7월 29일 일미수호통상조약
1861년 4월 12일 ~ 1865년 4월 9일
미국 남북전쟁 60만명 사망
1863년 6월 27일, 죠슈 5인 영국 밀항 이토 슌스케
(이후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몬타 (이후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오 요조, 엔도 긴스케, 노무라 야키치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
1866년 3월 7일 삿초 동맹 薩長同盟
1867년 11월 9일 대정봉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
1867년 12월 10일 사카모토 료마 암살(1836년 1월 3일 ~)
1869년 7월 8일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가이타쿠시) 에조를 홋카이도라 함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일본어: 廃藩置県 하이한치켄)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1894년 7월 24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1898년 4월 21일부터 8월 13일까지 미국 스페인 전쟁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
1964년 3월 23일 ~1988년 3월 13일
세이칸 터널 정식 개통
홋카이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세이칸 터널(青函トンネル) 53.85km의 세계최장
해저터널, 해저구간이 23.3 km이고 최고수심 140m 보다 100m 지하 통과 일본 공학, 건설, 기술의 당대 결정체
주요관광지

오타루 운하(小樽運河)는 홋카이도 오타루 시에 위치한 역사적인 운하로, 1914년부터 1923년에 걸쳐 1.1km의 운하 건설, 혼슈와 홋카이도 연결 무역과 물류의 거점, "홋카이도의
입구" 주변에 홋카이도의 물산, 특히 어업, 곡물, 석탄 등의 자원을 보관 창고 건설, 운하 주변은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로 번성하며, 오타루는 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20세기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대형 항만 시설과 트럭 수송이 발달하자, 운하의 기능은 쇠퇴 따라 운하와 주변 지역은 낙후되기 시작 1960~70년대 운하를 매립 도로를 확장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과 역사 보존 운동가들은 운하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며 철거에 반대 운동 1980년대 초반, 철거하는 대신 보존하고 재개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 운하의 일부를 매립해 도로 확장, 운하와 주변 석조 창고를 보존하는 계획이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가스등
야경과 석조 창고를 활용한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어 낭만적인 분위기를 제공하여 유명관광지로 재탄생
겨울에는 눈과 얼음이 운하를 장식해 특별한 경관을 연출한다.


삿포로 오도리 공원(大通公園)은 1869년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가이타쿠시)가 설치된 후 삿포로의 개발 초기 미국식 도시 계획을
도입해 건설한 곳으로 당시 건축 주자재들이 목조로 화재 위험성을 분산하기 위해 방화선(防火線)으로 가운데 커다란 공원을 배치해 동서로 도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시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삿포로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오도리는 공공 행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1910년대부터는 삿포로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로 점차 자리 잡았으며, 1950년
삿포로 눈 축제(さっぽろ雪まつり)등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조형물, 분수대, 그리고 이벤트 공간으로 기능하며 삿포로의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지하에는 여러노선 지하철 환승역으로 지하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공원 주변에는 삿포로 TV 타워가 위치해 있어 공원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현재 오도리 공원은 약 1.5km 길이로 삿포로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노보리벳츠 시대촌(登別伊達時代村)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노보리벳츠에 대규모 투자한 역사테마형 관광지로 주요 테마는 에도 시대(1603녀 ~ 1868냔)를 배경으로 하여 사무라이, 닌자, 마을 상인, 예술가 등 다양한 계층의 삶을 체험하고 건축 양식, 의상, 공연 등을 통해 과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버블경제시기
1980년대 대규모 투자를 진행 관광 산업이 성장하며 1989년에
개장했습니다. 당시 개장한 전국 많은 테마관광 시설들이 운영에 어려움을 격고 있으나 이곳은 홋카이도의
자연관광지와 연계한 역사테마 관광 프로그램으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쇼와신산(昭和新山)은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제124대 일본 천왕를 지낸 쇼와(昭和,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시기 1943년 12월 홋카이도 도야코(洞爺湖) 근처에서
지진과 함께 처음으로 땅이 융기하기 시작 1944년 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화산재와 증기가 분출1945년 용암이 분출하며 용암 돔(Lava Dome)형 단성화산(한 번만 분화한 화산)화산이 완성되었습니다. 현재의 높이 약 398m로 1957년
일본의 천연기념물(1957년) 이 일대는 도야코-우소산 지오파크(洞爺湖有珠山ジオパーク)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2차세대대전 말기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해가던 기간에 생성된 용암산에 “쇼화”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들이 기원한 것은 무엇 이었을까?

당시 홋카이도 소베쓰(壮瞥) 마을의 우체국장이자
지역 주민 미무라 마스오(三村益雄, 1904년 6월 12일~1983년 12월 29일)는 전문 지질학자는 아니었지만 마을에서 일어난 지속적인 지진 활동과 지형의 융기를 목격 화산이 점차 형성되는 동안 매일 폭발, 증기 분출, 용암 흐름, 지형
변화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 화산학 연구에 귀중한 일차자료를 생성해 일본 지질학 연구자들이 소와신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를 남겼습니다.


홋카이도 여행은 우리나라와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는 일본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 할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 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화속 강제적으로 통합된 이누이 원주민이 살던 땅에 일본 이주문화가 정착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일본을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가 성공한 정치적으로 자유민주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나 조금은 복잡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목하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삿초동맹을 이끈 사카모토료마가 암살로 생을 마감하며 메이지유신은 결국 민중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이 아닌 권력집단의 교체 정도 수준으로 마감이 되며 사회구조는 유지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 자유민주국가들이 투표시 기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직까지 중의원(衆議院), 참의원(参議院) 선거시 후보자 이름을 직접 기입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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