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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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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전환점에선 지식인의 사랑!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난한 일생을 체험한 세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1910년
세대라고 해도 큰착오는 없는 듯 하다. 태어나기 바로 직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나라 외교권을 빼앗겼고 1910년에 한일병합으로 한반도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식민시대 혼란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해방후 장년기에 한국전쟁을 격고 격심한 이데올로기 냉전시대를 온몸으로 살다 떠나야 했다.

사람들은 몸은 부모로 부터 받지만 정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속에서 채워간다.
시인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고 해방후 단절되 한반도의 북쪽에서 살았고 생을 마감했다. 이민족이 지배하는 국가체제와 오랜기간 한반도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유교라는 사회관습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념으로 단절된 공간에서 또 나머지 일생을 살아야 했다.

선대들의 고통과 희생을 거름으로 단기간에 비약적 경제성장을 달성한 대한민국에서 여행업자로 다양한 국가들을 여행하며
국가의 탄생에 기여한 역사속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장기간 식민지시대와 민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격고도
어떻게? 잿더미 위에서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비약적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현재는 왜? 비상적 사회현상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며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는 항상 궁금증으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한글”이
가장 큰 원동력 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로 작품활동을 하였고 한번도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사령부는 경성에서 신의주를 운행하는 경의선 철도를
차단하였다. 소련군은 38도선 부근 금교역에 70명, 신막역에 300명의
군인을 배치해 북위 38도선 아래로 남행하는 모든 열차의 운행을 일시에 막았다. 이어 9월 9일 미군이
경성에 진주한 이후에는 육로가 끊기고, 전기와 전화가 끊기고, 편지의
왕래가 중지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마자 한반도는 얼음장에 금이 가듯 쩍 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신의주, 석하. 백마. 비현, 양책, 남시, 차련관, 동림, 선천, 로하, 곽산,정주, 고읍, 운전, 영미, 맹중리. 신안주, 만성, 숙천, 어파, 석암, 순안, 간리. 서포, 서평양, 평양, 대동강, 력포., 중화. 흑교, 황주, 심촌, 계동, 사리인, 신풍산, 마동, 청계, 홍수, 서흥. 신막, 물개, 남천, 평산, 한포, 금교, 계정, 려현, 토성, 개성, 봉동, 장단, 문산, 금촌, 일산, 능곡, 수색, 신촌, 경성 백석은 경의선의 역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경의선은 총 연장 길이가 486킬로미터인데, 그 크고 작은 역 이름들은 고리처럼 가지런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그 고리는 뚝 잘라졌다.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반도의 허리에 38도선이 그어졌기 때문이었다.”

"문학도 국가의 문화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일본인이다 하는 데서 조선문학의 태도가 결정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면서 "조선인 전체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심력을 바치고"
문인들이 '문화전선의 병사'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러한 논리는 김동환. 백철. 최재서. 박영희 등의 문인을 통해서 확산되었고, 그들은 전쟁을 이기기 위해 조선의 청년들이 될 수록 많이 지원병 신청을 해야 한다는 글도 서슴지 않고 발표했다.”

“조선인이 스스로 말하야 천만가지 자랑이 있다 한들 헛된 말이다. 몬저 잇슬 것은 자랑과 희망이 아니다. 무엇인가. 근신과 분노와 비애다. 심각한 고통이다. 이것들이 조선의 혼을 꽉 붓잡는 것이다. 조선인이 고난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이 요설인 동안 이것은 거짓말이다. 조선인에게는
광명이 조요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에 감격하고 감사한 줄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요설인 동안 누가 이것을 거짓말이라 할 것인가.”

“생활에서 유리된 시,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서 까지도 유리된 시들이 어떻게 남을 감동시키며, 어떻게 인간의 생활에 기쁨을 줄
수 있것 습니까? (...) 참으로 문학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우주 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을 두고 감동 속에서 사색하게 하는 것입니다.”

“1996년 1월, 백석은 여든다섯 살로 세상을 마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리윤희(71세)와 첫째아들 화제(51세), 만딸 지제(46세), 둘째아들
중축(42세), 막내딸 가제(40세), 막내아들 구(38세)가 남았다. 막내아들은 북한에서 운전수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기준)
1995년 북한의 국문학자 류만은 "백석은 세태 풍속을 기본으로 노래 하면서 민족적 정서를 진하게 체현하고 독특한 시풍을 보여준 시인" "시인은 자기의 시들을 통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하여 비록 모든 것이 짓밟히는 처지에서도 생활의
구석구석에 조선적인 것, 민족적인 것은 살아 숨쉬고 있으며 거기에 사람들의 삶이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로 백석 시를 평가했다.

책속에는 스위스 베른과 독일 주요도시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독일 작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년 12월 18일~1940년 6월 29일)의 그림 작품들 들어 있다.
작가는 유럽을 피로 채운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 두번의 죽음시대를 격어야 했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방응모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로 유학을 갔다 1934년 귀국 조선일보에 근무하다 퇴사후 1936년에 함흥 영생고보 영어선생으로 부임한다. 선생님들과 유명한 요리집 함흥관을 갔던 25세 백석은 함흥권번 출신 예명 진향이라는 22살 기생의 첫번째 손님으로 만난다. 첫눈에 반한 청춘들의 사랑이 시작되고 시인은 아명으로 진향을 “자야”로 불렀으며 경성에서 재회후 동거까지 하였으나 유교적 가정환경으로 정식결혼은 다른 여성들과 하게된다.

해방후 북쪽에 머문 백석과 다른 삶을 살던 자야는 한국전쟁중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요정을 개업했었고 서울에서도 유명한 요리집 대원각을 경영하였다. 대원각 주인 본명 김영한은 오랜기간 걸처 요청하여 1995년 7,000평 땅과 부속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현재 도시속 대중들의 휴식처 길상사로 되었다.

밭에 풀어 놓은 망아지들이 천방지축 뛰어 놀듯 청춘의 사랑에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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