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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역]  인바운드여행 추천 도서 – 임금되고 신하되고, 임금의 보필자들
작성자 : 한재철  작성일 : 2025-10-11  조회 : 1015
  • 임금과 보필자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1910년 순종까지 총 519년간 27명의 왕이 통치하며 존속한 조선왕조는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1910년 한일병합으로 멸망할 때까지 왕조의 명칭은 조선으로 유지되었다.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격고 1955년~1963년(1차)과 1964년~1974년(2차)에 태어난 베이붐세대들은 급속한 경제성장속에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한 세대이다. 군사독재시대에 태어나 국민이 권력을 가지는 현대민주주의 국정운영과 전제군주제 왕조시대였던 조선시대의 차이점을 배울 기회는 더욱 없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 시대 519년 존속하며 조선왕조를 유지했던 통치제도가 가지는 장점 보다는 당쟁이라는 정치구조가 가지는 부정적 권력투쟁만을 강조하여 우리민족 내부 분열을 부추기는 부정적 정치구조로 교육했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전제군주가 통치하던 시대에도 임금의 권력 남용을 막는 제도가 작동했기에 519년간 지탱 할 수 있었다. 임금의 능력으로 이러한 제도를 잘 운영되던 시기에는 백성들도 태평성대를 누렸으나 또 욕심에 따라 백성들의 삶도 크게 영향 받았다. 조선시대 임금의 권력을 견제하던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는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으로서, 일찍이 이 두기관의 관원을 대간(臺諫)이라 불렀고, 양사(兩司)와 더불어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왕의 학문적·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였던 홍문관(弘文館)과 함께 언론삼사(言論三司)로 불리며 ① 간쟁, ② 탄핵, ③ 시정, ④ 인사등을 담당하며 임금의 올바른 국정운영을 보좌했다. 

     


     

    조선의 제19대 국왕으로 45년 10개월 조선왕조 두번째로 장기간 1674년 9월 12일 ~ 1720년 7월 12일 재위하며 서인과 남인간의 정치세력을 적당히 이용하는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던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시대 발생한 다양한 정쟁은 역사사극에도 자주 등장하는 흥미진지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특히 숙종이 총애하던 희빈 장씨집안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사극의 배경이 되었다. 숙종은 조사석의 승진과 관련해 장희빈의 어머니와 사이에 추문이 일어나자 임금 면전에서 이를 따저 묻는 김만중을 파면하게 된다.

     


     

    김만중(金萬重, 1637년 3월 6일~1692년 6월 14일)은 1648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을 쓸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고, 1650년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653년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조사석(趙師錫, 1632년 ∼ 1693년), 1660년(현종 원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662년(현종 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687년, 숙종 13년 9월 11일 

    임금이 이르기를,

    "조사석이 불안하게 된 것은 과연 무슨 일 때문이겠는가?"

     

    하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후궁 장씨(張氏)의 어미가 평소에 조사석의 집과 친밀했었습니다. 대배(大拜)가 이 길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신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마땅히 환하게 트이어 조금도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인 데다가 전하께서 물으시는데 신(臣)이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며 이르기를,

    "나와 같이 재주도 없고 덕도 박한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한 말을 듣게 되니 진실로 군신(群臣)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김창협이 한 일은 비록 해괴하기는 했지만 어찌 죄를 그의 아비에게 옮길 리가 있겠는가? 이단하(李端夏)는 정승의 직책에 합당하지 못함을 내가 본래 알고 있었거니와, 속담(俗談)에 ‘차례로 하는 대간(臺諫)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또한 어찌 차례로 하는 대신인들 없겠느냐? 조사석을 이미 연줄을 대어 정승이 되었다고 했으니, 광해군(光海君) 때에 값을 바치고 벼슬을 얻게 된 일과 같은 것인데, 금을 받은 것이라 여기느냐, 은을 받은 것이라 여기느냐? 분명히 말의 근거를 대라.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신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해놓고 또한 한 말의 근거를 물으십니다마는,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어찌 말의 근거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륙(誅戮)을 받게 되더라도 신이 진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마는, 이는 전하께서 바로 신(臣)을 형륙(刑戮)에 빠뜨리시려는 것입니다."

    하며,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화를 내어 음성과 안색이 모두 엄해지며 다그쳐 묻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달려나가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겠습니다." 

     

    1692년, 숙종 18년 4월 30일

    “전(前) 판서(判書) 김만중(金萬重)이 남해(南海)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했는데, 나이는 56이였다. 김만중의 자(字)는 중숙(重叔)이고 김만기(金萬基)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 벼슬을 하면서는 언론이 강직하여 선(善)이 위축되고 악(惡)이 신장하게 될 때마다 더욱 정직이 드러나 청렴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고, 벼슬이 높은 품계(品階)에 이르렀지만 가난하고 검소함이 유생(儒生)과 같았다.” 

     

    1693년, 숙종 19년 12월 24일 

    “전 좌의정(前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귀양간 곳에서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62였다. 조사석은 조정에 벼슬하면서 시속을 따라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었으므로, 언어와 의논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무리와 몰래 결탁하여 정승의 지위에 임명되기를 도모하기까지 했으므로, 더욱 청의(淸議)가 비루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었다. 뒤에 왕비의 지위가 뒤집힌 것도 화단(禍端)이 실제로 조사석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조사석이 마음에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여 몰래 알선(斡旋)하여 지난번의 잘못을 속죄(贖罪)하려고 하다가 흉당(凶黨)들에게 발각당하여 죄를 얽어 고성(固城)으로 멀리 귀양가게 되었는데,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 병이 되어 졸(卒)하였다. 뒤에 충헌(忠憲)이라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역사가 반복한다고 하듯 약 340년전과 같이 지난 몇년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영부인, 장모와 관련한 이야기가 언론에 등장했다. 권력으로 언론을 막고 기자가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국민들 삶이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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