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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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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역으로 성장하는 국가경제 특성상 이제 해외여행은 우리국민들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해외여행은 우리가 배웠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하며 미래 성장동력 생생한 지식을 얻는 평생교육의 순간이다. 청소년시기 상당히 따분하게 근대세계사 역사공부 시간에 배운 미국의 독립전쟁이 현대 다양한 국가들 탄생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해외여행을 하며 발견하게된다.
대영제국을 상대로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로 시작된 식민지 미국의 독립전쟁이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종결되기 까지 프랑스는 화약, 탄약, 보급품, 전쟁비용 등 현물 지원을 포함하며 연간 재정 수입의 400% 수준 약 13억 리브르(livres)를 지원 했으면 특히 해군 함대 파견으로 1781년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며 미국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기여했다. 미국독립전쟁 전쟁비용 지원으로 파탄난 프랑스 왕실 재정 회복 위해 도입한 과다한 세금정책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어 절대왕정 군주체제가 붕괴하며 세계적으로 근대적 시민공화국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E.J.시에예스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의 시기 베트남 레 왕조(전기: 1428년 ~ 1527년, 후기: 1533년 ~ 1789년) 말기 북부 찐씨 정권과 남부 응우옌씨 정권의 극심한 정치 부패와 사회 혼란, 그리고 베트남의 남북 분열속 중부 빈딘(Binh Dinh)성 떠이선(Tay Son) 출신의 3형제 형제(응우옌반냑, 응우옌후에, 응우옌냑)가 남정권(꽝남국)에 반발하며 1771년 세계 최초의 농민혁명 떠이선(Tây Sơn) 봉기를 일으키며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고 떠이선(Tây Sơn, (1778년 ~ 1802년)왕조를 세우며 베트남 통일왕조를 세웠다.
떠이선(Tây Sơn)봉기 때 남정권 왕 응우옌 푹 아인(Nguyễn Phúc Ánh, 1762년 2월 8일 ~ 1820년 2월 3일)은 시암의 라마 1세에게 지원 받은 5만 명 규모의 병력으로 저항 했으나 1785년 1월 19일 락검-쏘이아뭇 전투에서 시암군이 전멸하며 패배하고 시암으로 망명하게 된다. 떠이선 군은 북쪽에서는 청나라 20만 지원군을 격파하고 베트남 남북을 통일하며 떠이선 왕조를 세워 약 20년간 통치한다. 응우옌 푹 아인은 1777년 푸꾸옥 섬에서 프랑스 선교사 아드랑 주교 피뇨 드 베엔(Pierre Joseph Georges Pigneau, 1741년 11월 2일 - 1799년 10월 9일)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아들 응우옌 푹 까인(Nguyễn Phúc Cảnh, 1780년 4월 6일 - 1801년 3월 20일) 왕자를 피뇨 주교와 프랑스로 파견했다.

루이 16세와 1787년 프랑스가 군함 4척과 병력 1,650명을 파견하며 베트남 내 특정 지역에 거류지 설치할 권리, 중부의 다낭(투란) 항구, 꼰다오(Poulo Condore) 섬 할양, 모든 유럽 국가를 배제하고 무역 독점권 등을 부여 받는 군사 원조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을 체결했으나 미국독립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가 조약 이행을 할 수 없게 되자 피뇨 주교는 사비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등 서양식 요새 건축 기술자등을 동원해 응우옌 푹 아인을 지원해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1802년 6월 1일 베트남 마지막 봉건왕조인 응우옌 왕조(Nhà Nguyễn, 1802년 ~ 1945년)의 자롱 황제(Gia Long)로 등극 1804년 청나라로 부터 '베트남(Việt Nam)'이라는 국호를 받아 후에(Huế)를 새로운 수도로 20년간 통치하는 발판을 만들어 줬다.
그러나 응우옌 왕조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1832년 가톨릭을 완전히 불법화하고 선교사 처형등 강력하게 단속하자 과거 1787년 조약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나폴레옹 3세는 베트남 침공을 단행 1858년 9월 프랑스군-스페인 연합군이 다낭으로 상륙해 남부로 이동 1859년 2월 사이공을 점령하자 프랑스에 굴복하며 1862년 6월 메콩강 삼각주 남부 코친차이나 3성(Bien Hoa, Gia Dinh, Dinh Tuong), 쁠로 꼰도르 섬(Poulo Condore Island)를 할양하고 자유로운 선교 활동 보장과 무역을 인정, 배상금(400만 멕시코 페소)을 지불하는 조건의 제1차 사이공 조약(Treaty of Saigon)을 체결 프랑스 식민지배의 첫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1867년 코친차이나 서부 3성(Vĩnh Long, An Giang, Hà Tiên)을 무력으로 점령 점령하여 남부 전체를 식민지화했다.
1874년 3월 제2차 사이공 조약 (Treaty of Saigon)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6성 코친차이나 지역의 외교권까지 장악하며 프랑스의 보호국(protectorate)이 된다.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응우옌 왕조를 압박 1883년 8월 25일 베트남 중부 안남과 북부 통킹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인정하는 후에 조약 (Harmand Treaty)을 체결하고 1884년 5월 청나라와 베트남 종주권을 포기하는 톈진 협약(Tientsin Accord)을 체결 베트남 전체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확인 받고 1884년 6월 6일 후에 조약(Treaty of Huế)을 통해 70년간 베트남 전체에 대한 프랑스 식민 통치를 시작한다,
프랑스는 1887년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베트남을 합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French Indochina Union)을 수립했다.
일본제국은 독일 나치와 1936년 11월 25일 반코민테른 협정(Anti-Comintern Pact)을 체결하고 1940년 9월 27일 이탈리아가 참여한 삼국 동맹 조약(Tripartite Pact)통하여 아시아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여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 정권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며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속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중.일 전쟁(1937년 ~ 1945년) 상태 일본군이 베트남의 지배권을 행사하며 1940년부터 중국 중칭으로 들어 가는 군수물자를 차단하려 북베트남 점령을 시작 1945년 초까지 일본은 꼭뚜각시 프랑스 비시정부 식민 행정 기구를 그대로 존치시킨 채 군사적 실권을 행사하는 이중 지배 형태를 유지하다 전쟁말기 1945년 3월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하고 직접통치했다.
1944년 ~ 1945년 일본의 과도한 쌀 공출과 물자 수탈, 기상 악화가 겹쳐 북부 베트남 대기근발생 200백만명 아사자 발생 호찌민(Hồ Chí Minh, 1890년 5월 19일~1969년 9월 2일)은 1941년 5월 19일, 베트남 북부 까오방성 팍보(Pắc Bó) 동굴에서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기치로 베트남 독립 동맹(베트민, Việt Minh)을 조직 항일 투쟁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하노이를 점령하고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 공화국 독립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기존 식민지 권리를 주장하고 북위 16도선 이북에 일본제국군 무장 해제를 위해 주둔 중이던 중국 국민당군의 철수가 필요한 상황에서 1946년 3월 6일 베트남 민주공화국(DRV)과 프랑스 사이에 호-생테니 협정(Ho–Sainteny Agreement)을 맺어 매년 5분의 1씩 감축되어 5년 내에 완전히 철수 한다는 조건으로 15,000명의 프랑스군의 베트남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 프랑스 인도차이나군이 1946년 3월 18일 하노이에 입성했다.
그리고 베트남의 남부 3개 지역(코친차이나, 안남, 통킹)의 통일 여부는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군이 하이퐁을 포격하자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a War)을 시작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키며 8년간 독립전쟁을 끝내는 항복을 받아내고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Geneva Agreements)을 통해 프랑스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프랑스군은 1954년 10월 10일 하노이, 1955년 5월 13일 북베트남 하이퐁 시, 1956년 4월 28일 사이공에서 철수하며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공산주의 진영)과 남베트남(자본주의 진영)으로 분단상태에 놓였다.

프랑스군이 베트남 남부(코친차이나)를 장악하기 시작한 1860년대 초, 사이공의 전체 인구는 약 6,000명 이었으며 1900년경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은 약 11,000명 정도, 1901년 코친차이나에서 첫 인구 조사 당시 사이공 지역의 유럽 인구는 약 4,000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인 거주자 수는 증가 1940년경 유럽인(대부분 프랑스 시민) 인구는 약 34,000명에서 40,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이들은 주로 하노이와 사이공 같은 도시 중심지에 집중 거주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대부분의 외국인이 추방되었고 주로 사이공에는 1967년 기준 약 17,000명에 이르는 여전히 많은 프랑스인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베트남 마지막 응우옌 왕조를 개국 한 “응우옌(Nguyễn)”을 성씨로 사용하는 인구는 현재 약 3,700만 명 38.4%에 달하는 매우 높은 비율로 베트남의 가장 흔한 성씨이다. 왕조를 개국한 응우옌 푹 아인은 후세에게 유훈으로 “프랑스에 감사하되, 그들이 네 궁궐에 발을 들여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뱀을 어깨에 얹고 와서 자기 닭을 물게 하는 격"이었다는 평가를 하였다.

국익이 우선인 국가간 외교적 거래에서 스스로 자주할 수 있는 국력이 없는 경우 국가간 약속은 흐르는 물에 대고 하는 약속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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