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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경득답 추천 여행서적- 조엄 “해사일기, 海槎日記” 조선 공무원의 통신사 출장 보고서
작성자 : 한재철  작성일 : 2021-06-16  조회 : 1776
  •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가 전국시대를 정리하고 일본열도를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하기 전까지 각 번들은 번주들이 독자적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율령국(律令国)으로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제도는 메이지유신으로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로 바뀌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역사적으로 부산과 삼남지역,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오랜기간 백성들이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한반도 왕조들은 적극적으로 일본원정을 하지 않았으나 몽고가 대륙을 점령하고 세운 왕조 원나라의 요구로 고려시대 1274년, 1281년에 대규모 원정 하였으나 폭풍으로 실패했다.

    활을 주무기로 하는 고려 군사는 흔들리는 배에서 적을 맞추기 어렵고 섬나라 왜구들은 바다 생활에 익숙해 배를 이용한 해전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1357년 강화도 교동까지 점령해도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1378녀 6월 일본(日本)의 규슈(九州) 절도사(節度使) 미나모토 료순(源了俊)이 승려 신홍(信弘)을 보내 와 왜구를 잡았다. 이에 앞서 우왕이 판전교사(判典校事)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 해적을 금지하라고 하니 일본이 대답하기를, “귀국을 침범하는 자는 우리 서해도(西海道) 규슈의 완고한 백성들이다. 우리나라에서 곧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해적을 금지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해적이 오히려 약탈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또 정몽주(鄭夢周)를 보내서 교류의 이해(利害)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니, 일본 사람들이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미나모토 료순이 신홍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적의 무리를 사로잡도록 하였다. 여러 차례 싸우다가 신홍이 병사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 5월에 일본이 다시 박거사(朴居士) 등을 보내 해적을 토벌하였다.(고려사)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고 1380년 8월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가 심덕부(沈德符)ㆍ최무선과 함께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고려군이 진포(鎭浦)해전에서 최초로 화포를 이용해 500척 왜구를 소탕하였다.

    고려말에도 일본에 사진을 파견 하였으나 조선(朝鮮1392년~1897년)의 개국후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하고 본격적으로 축하 사절, 외교적 현안을 해결등을 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그리고 1582년 야마자키 전투의 승리로 주도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 관백으로 전국시대 통일후 조선에서 파견한 1590년(선조 23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종사관 허성 1590년 3월 6일 출발해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귀환한 통신사는 3월 조정에 정사와 부사가 다른 보고를 한다. 정사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 할 것으로 보고 하나 부사인 김성일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 하고 조정은 부사의 보고를 채택 전쟁방비를 하지 않는다. 이윽고 일본의 조선을 침략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 정유재란 1598년 12월 까지 으로 오랜기간 한반도는 막대하게 전쟁 피해를 당한다.

     

     https://www.koryomuseum.or.jp

     

     

    “해사일기, 海槎日記”는 조엄(趙曮, 1719년 ~ 1777년)이 1763년(영조 39)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일본에 통신사 정사로 다녀온 일기 형식 기록이다.

    일본에서 보고 들은 그리고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특징들은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이전에 없었던 수행원 최천종(崔天宗)이 오사카에서 대마도인 스즈키(鈴木傳藏)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현지에서 일본 담당자들에게 살인자의 체포와 처단까지 꼼꼼하게 챙겨 외교관으로 백성의 원한 뿐만 아니라 앞으로 같은 사건 발생시 규례가 되록하여 스즈키의 체포와 단죄까지 모두 기록하고 피해자 가족에게도 전하도록 하였다.

     

    서불(서복)은 진시황제에게 불사초를 구한다고 뻥을 치고 어린남녀 수천명을 데리고 대륙에서 바다로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책에는  그 다음 도착, 귀환 이야기는 없는데 일본에 삼신산이 있고 서불의 묘가 있다는 주장에는 “사람 목숨을 구하는 영험한 약을 구하는 데는 반드시 인삼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서불이 인삼도 나지 않는 일본에 반듯시 왔다는 것도 이미 믿을 수가 없는데 신선의 약초를 이 섬의 세산에서 캤다는 말은 또 가죽이 없는 터럭이다.”고 하였다.

     


     

     

    조엄은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중 조선에 이로운 것이 있다면 그림을 그려 그 구조를 파악하게 하였고 특히 섬 대마도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 이야기를 듣고 “이 섬 안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이름은 감저또는 효자마라 부른다. 일본식 발음으로 고귀위마라 한다. ~~생것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으며 역시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곡식과 섞어서 죽을 쑬 수도 있고 잘라서 정과로도 만들 수 있다. 혹은 떡을 만들거나, 혹은 밥에 섞을수도 있어 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라 할만하다.”고 하여 씨앗과 재배방법등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조선에 고구마를 전파한다.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초기의 통신사는 주로 왜구와 포로문제 해결 관련 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는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통신의 의미가 커지게 된다. 특히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江戸幕府)는 정권교체등 전통성을 과시하는 행사로 통신사를 초청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 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역사속 기록에는 일본이 한국을 900여회 침략했으며 대부분은 왜구의 노략질 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후 임진왜란으로 시작하여 민족의 아픈역사인 식민지시대 까지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침략전쟁이었다.

    일본 극우 보수집단이 장기간 정권을 잡으며 다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다시 한번 조선시대 통신사의 의미를 찾아 보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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