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이며, 당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등극한 후에 이름을 `조(曌-비칠 조 : 무측천이 새로 만든 글자임)`로 고쳤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수 양제 때 목재상이었는데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그는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과 친분을 가까이 하였다.
617년 당 고조 이연이 거병하자 무측천의 아버지는 군수물자 담당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태원군공에 봉항으로써. 14명의 개국공신중의 일원으로서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
620년 무측천의 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권세가 양달의 딸과 재혼하여.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무측천은 어린때부터 총명하고 담량이 남달랐으며.무측천 아버지도 일찍브터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의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죽은 후, 이듬해에 태종은 용모아 재질이 뛰여난 14살의 무측천을 황궁으로 불러 재인(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649년 태종이 세상을 뜨자 황실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이듬해 태종의 기일에 황제가 된 고종은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무측천의 아릿다운 모습을 반해. 예교의 속박을 버리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무측천이 재입궁할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와 후궁 소숙비의 다툼이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적수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어서 왕씨는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켰던 것이다. 황후 왕씨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진심으로 모셨으며 고종은 그러한 무측천을 더욱 좋아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측천의 품계도 정이품 소의(昭儀)까지 올라갔다. 이로써 그녀는 9명의 빈(嬪)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그녀의 위에는 황후와 4명의 비(妃)밖에 없었다.
순조롭게 황제로 등극하기위해서 무측천은 미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 나갔다.
당 고조 이연의 11번째 아들 이원가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측천은 즉시 진압하고 황제의 등극을 향하여 계속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그녀의 권세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날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도읍지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가 되였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즉위할때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였다.
705년 무측천은 82세의 고령에 병까지 겹친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때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문무대신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무측천의 환관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 등을 죽이고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을 황제로 옹립한 후 `당(唐)`이라는 국호와 당왕조 전장제도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무측천을 그대로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으면서 존대하였다.
그해 11월 중종이 병문안을 오자 무측천은 중종에게 무씨(武氏) 집안을 잘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한 후,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82년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모두 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꿈만 같구려. 차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는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주시오.˝
그리고 중종에게 자기에게 학살된 황후와 저수량(褚遂良: 596~658)•한애(韓璦) 등의 가족을 사면해 달라고 부탁했다.
705년11월2일 태평공주에게는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딸로 나만큼 총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총기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마라.˝는 말을 남기고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82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