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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해조차지역사
작성자 : 상하이  작성일 : 2011-11-23  조회 : 2678
  • 상해공공조차지(영문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는 중국에서 제일먼저 생겨난 조차지로서 동시에 중국근대사에서 두개의 공공 조차지 즉(하문고랑서공공조차지)와 함께 병행했으며 상해의 두개의 조차지중의 하나(프랑스조차지)로서 중국조차지 역사상 제일 일찍 개발되였고 존재한 시간이 제일 길었으며 아울러 면적이 제일크고 관리기구도 제일 방대했으며 발전이 제일 잘 되였었던 조차지이다.。
    1843년11월《중영남경조약》근거하여 상해를 외국상인들한테 개방한 통상항구로 규정지었으며 12월 상해지방정부와 영국영사관사이에 외탄지역을 영국조차지의 남북계선으로 정하였고 1844년에 이미 영국의 이화양행과 보순양행이 일부분의 땅을 세맡았다.1845년 중영정부는 상해토지규칙에 근거하여 영국조차지의 서쪽경계선을 현제의 하남로로 정햇다.1848뇬 11월27일 영국조차지의 서쪽경꼐지역을 오늘의 서장로까지 확장하였으며 같은해 상해지방정부에서는 영국성공회전도사의 건의에 응하여 현제의 홍구지역을 미국조차지로 정하였다.
    1863년9월7일 소도회(민간봉기군)가 상해현성을 점령하자 중국정부에서는 조차지에 대한 공제권을 상실했으며 1854년7월11일 상해영프조차지는 독립적인 시정부기관인 상해공부국을 설립했고 경찰등 무장 기관을 설립하고 정식으로 중국내의 독립적인 나라권리를 양수할수 있는 그런 실권을 장악하게 되였다.
    1862년 프랑스조차지지가 연합조차지에서 탈퇴하고 자체로 공동국을 설립하고 1863년 9월 영국과 미국이 상해에서 정식으로 합병하여 공부국이란 기관에서 공동으로 관리를 하게 되였다.
    1899년 5월 상해공공조차지는 더욱 확장이 되면서 면적도 기존의 33503무로 동으로는 오늘 포동육가취지역 북으로는 현재보산구지역 서로는 정안사지역까지 확장이 됨으로 중.북.동.서 4개구로 분할이 되였다.
    30년대 중국의 5.4학생운동이후 대규모의 확장은 거의정지상태에 이르렀고 장개석정부가 남경에서 10년동안 집권당시 상해조차지는 다시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1937년 8월13일부터 11월10일 송호전쟁중 일본은 공공조차지의 북지역과 동지역을 점령하고 해군으로서 조차지의 치안을 관리했었으며 공공조차지는 실질상 두부분으로 나뉘여졌으며 조주하 이북지역은 일본군이 관할하는 세력범위로 되였다.일명 상해일본조차지라고 하였다.
    북구와 동구의 일본점령구가 중국군의 진공을 받으면서 약 70프로정도의 조차지는 전쟁에서 심한 파괴를 입었다.공공조차지의 부분적인 중구 서구 및 서북월계지역은 영국.미국.이태리 등 군이 지키고 있었음으로 중일전쟁중에서 4년동안 평온을 유지해왔으며 조차지내의 중국정부기관들은 정상적인 업무를 유지하게 되였고 약 40만명에 달하는 중국난민들의 피난소역할도 하였다.
      1940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생되자 상해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들은 철거를 하였고 1941년12월8일 태평양전쟁이 폭발하자 일본군은 공공조차지의 중구.서구로 침범을 하였고 1943년 1월 미국과 영국은 당시 집권당인 국민당정부와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약 100년간 차지하고 있었던 공공조차지는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였다.
    1943년8월 일본의 점령하에 왕정위 일파는 일본정부로부터 상해조차지를 관리할 권할을 넘겨받으면서 일본의 괴뢰역할을 하였다. 
    조차지가 왕정위의 손안에 들어오면서 역시 상해제일 번화한 지역이였고 상해정부는 기존의 상해공공조차지공부국에 설립을 했었다.1955년 기존의 회풍은행청사로 옮겨졌으며 후에는 상해 인민광장지역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사실상 그 정부기관은 상해기존의 조차지지역을 벗어나질 않았다.
    1843년 제일처음 상해로 왔었던 영국상인 및 전도사 26명으로부터 1865년에는 이미 1372명으로 늘어났으며 전체 외국인의 60프로를 차지했다.태평천국운동이 결속된후 상해의 부동산업이 점차 식으면서 영국교민들도 1870년에는 약894명으로 줄었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또다시 많은 영국인들이 상해로 이주하면서 1935년에는 6221명의 영국인들이 상해에 거주함으로 공부국이사회성원중에서 영국이사들이 대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실은 영국이 그냥 실질적인 권리를 향수하였다.
    조차지내에서 영국교민버금으로 경제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미국교민들은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1935년에는 영국교민보다 2000명정도 더 많았고 1600명정도는 프랑스조차지에서 생활을 했었다.
    영국교민중 전도사가 많이 있었고 그들은 조차지내에 교회당을 설립하고 병원.학교 등을 설립했는데 호강대학.동오법학원등이 미국인들이 설립한 대학교이다.공부국이사회에서 미국사람들의 세력이 영국 다음으로 확장을 하면서 1920년에는 Stirling Fessenden이 공부국이사장직을 담임하였고 교민들중에서 그래도 영국교민들의 생활질이 제일 높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후 독일인들은 상해에서 경제실력이 영국과 미국다음으로 강해지면서 인쇄.나염업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되였다.1873년 공부국이사회에서 1석밖에 차지못했던 독일이 1915년에는 이미 1155명의 독일교민들이 상해에 거주를 하게 되였으나 차차 그 인원이 감소되면서 1920년도에는 약 280명으로 감소되였고 프랑스조차지에 약 9명정도 살고 있다가 후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였다.
    1871년 중국과 일본이 수교한후 일본인은 상해로 몰려들면서 처음 들어온 일본인들은 대부분 오송로.무창로 일대에서 작은 장사를 하거나 기생집등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나 1915년 조차지내의 일본일들이 이미 7169명으로 늘어남으로써 전체적인 외국인들중에서 1위를 차지했었다.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일본방직업은 상해에 대규모로 투자를 하였고 1935년이미 교민이 2만명으로 전체 외국교민중의 반수이상을 차지했었고 주로 홍구오송로일대와 북구 월계지역인 사천북로북쪽에서 생활을 했었다.1915년 공부국이사회에는 일본이사가 2명정도 있었고 공공조차지의 동.북쪽 지역은 수차례 일본군의 방어구역으로 되였고 1932년과 1937년 두차례 호송전역에서 일본은 이 구역을 중국군관 싸우는 근거지로 만들었다.동시에 해군을 파견하여 이지역의 치안을 관리하였고 소주하이북지역은 일본군의 세력범위로 되면서 상해일본조차지라고도 하였다.
    19세기에 소수의 유태부상들이 인도에서 발전을 가져온후 다시 상해로 와서 발전을 하면서 대부분 영국의 국적을 취득했다.그중에 사손가족과 가도리가족은 상해에서 재빨리 치부를 하면서 대부분 무역업에 종사를 하다가 후에는 차차 부동산업으로 전변하면서 상해의 부유층으로 부상되였다.러시아혁명이후 많은 러시아 유태인들이 하얼빈을 통해 상해로 이주해오면서 약 1000명정도로 인원이 늘어났고 주로 가죽제품장사를 하였고 알부분 사람들은 병원.건축.법률.음악 등업에 종사함으로써 대부분 홍구 화덕로 모시회당부근에서 살았다.
    1938년 독일 오지리 필란드등 나라에서 약2만명정도의 유태인이 나치스독일의 핍박을 피해 상해로 도망을 왔었는데 유일하게 아무런 비자도 필요없이 상해로 들어오는 외국인에 속하였고1943년에는 일본군이 약 14245명에 달하는 유태인을 홍구지역으로 격리시켰으나 이런 악렬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간고분투하면서 약 307개정도의 점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들만의 특유한 장사기질을 나타냈었다.
    상해공공조차지의 대부부 포루투갈인들은 마카우에서 이주해왔고 혼혈인에 속하였기에 대부분 영국과 미국기관에서 하층직을 맡고 있었고 1920년에서부터 1930년사이에는 약 1000명정도가 상해에 거주를 하고 있었다.
    1884년 공부국에서 경무국을 설립하고 순경을 모집했었는데 대부분 순경들은 인도에서 모집을 했었고 1935년에 약 2341명정도의 인도인들이 상해에 거주를 했었다.。
    조차지 설립초기 중국인과 외국인 분거정책을 실시하였고 양행서비스의 매입자인 중국인들(주로 광동이나 녕파에서 온 사람)은 조차지내에서 생활할수 없었고 조차지내에는 약 500명정도의 중국농민들만 거주할수있게 하엿으나 1853년 소도회가(봉기군)가 상해를 점령하면서 약 2만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조차지내로 도망을 갔었고 1860년도에 태평천국운동이 있으면서 태평군이 소주를 점령하자 약 50만에서 70만명정도 난민이 상해조차지내로 들어가면서 외국상인들은 이 기회를 빌어서 많은 석고문건축을 짓고 이런집들을 세집으로 내놓으면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잡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조차지의 인구는 대폭 줄었으나 조차지의 。공상업이 발전을 가져오면서 또 다시 많은 강소 절강 광동지역의 상해조차지로 들어와서 창업을 하고 생계를 유지함으로써 조차지내의 중국인들은 급속이 증가함으로써 1932년에는 약 100만정도의 중구인들이 조차지내에서 생활을 하였다.
    중일전쟁시기 상해조자지중에서 중서두 구역으로 나뉘였고 약 40만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조자지내에서 부동산업.상업.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인구밀도가 급속히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거주환경이 악렬하게 되였다.
    1928년에 공부국에 중국이사들이 3석에서 4석정도를 차지할정도로 발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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