豫园(Yu Garden)位于上海老城厢东北部,北靠,东临
예원(Yu Garden)상해노성상동북쪽 즉 북쪽으로는 복우루(福佑路).동쪽으로 안인가(安仁街).서남쪽으로는 노 성황묘(老城隍庙).서남쪽으로는 예원상사와 인접되여있다.예원은 노성상내에 유일하게 보존되여있는 명대원림이다.정원내에는 아름다운 루각들.조형이 특이한 산.호수가 있어서“奇秀甲江南(기수갑강남)이란 미칭도 지니고 있다.예원을 짓기 시작할때는 명가정년간.원래는 반씨 사유정원이였다.1559년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명나라때 개인화원이 였고 면적은 30여무에 달했으며 원내에는
(수이탕)穗堂、(대형가산)大假假山、(철사자)铁狮子、(쾌루)快楼、(득월루)得月楼、(옥영롱)玉玲珑、(적옥수랑)积玉水廊、(청도각)听涛阁、(함벽루)涵碧楼、(내원정관대청)内园静观大厅、(고희대)古戏台등 정대루각과 가산、및 인공못 등 40여곳의 고대건물이 보존되여있다.
예원은 그 설계가 정교하고 구조가 세밀하며 청유수려하고 깜찍함속에 웅장함을 내포하고 있어 작은데서 큰것을 볼수 있음으로 명,청 시대 중국남방지역의 원림 건축예술의 풍격을 잘 표현해냄으로써 강남고전원림중의 빛나는 별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청나라말기 소도회봉기(小刀会起义)때 예원내(점춘당)点春堂을 북성지휘부로 정하였고 해방후에는 즉 1949년후에는 인민정부에서 예원에대한 대규모 수건을 하면서 오랜역사시간을 거쳐오면서 파손되였던 부분들도 원래모습대로 거의 수건이 되였다.
전체 예원을 4개부분으로 나눌수 있고 원내에는 수백건의 역대 액자.석각,명인친필로 제사가 남겨져있으며 1959년에 상해시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였고 1961년부터 국민들한테 개방을 하였고 1982년2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으로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였다.예원에는 성황묘 및 옛거리등 인기관광코스가 있으며 부근에는 유명한 먹거리 많은데 특히 남상쇼우룽보우(南翔馒头店)는 딤섬요리로 인기가 대단하며 그위에도 녹파랑,상해노반점 등 유명한 식사장들이 있다.
예원역사편

예원의 본 주인인 반윤단(潘允端)은 명나라 형부상서(최고검사) 반은(潘恩)의 아들로서 가경38년 즉 1559년에 응리부에서 보는 과거시험에서 낙방되자 정원을 지어볼려는 생각이 들어서 상해 성황묘서북쪽에 있는 넓은 채소밭에 인공산 인공못을 만들면서 정원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그러나 가정41년 즉 1562년에 외지로 가면서 한때는 정원만들기를 멈추기도 했었다. 《豫园记》(예원기)의 기재에 따르면“垂二十年,屡作屡止,未有成绩
취20년,정원을 만들다가 그만두었다 하면서 큰 성과는 없었다라고 적혀있다.
1577년 반윤단이 사천성부정사란 직급에서 손을 떼면서 고향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로부터 온갖 심혈을 몰부어서 정원만들기를 재차 시도하였는데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원예명가인 장남양선생님을 모셔다 첩산설계를 부탁받았고 만들면 만들수록 면적도 커져서 총면적이 70무까지 확장이 되였다.”
명나라 중,후엽에는 중국에는 강남문인들이 정원만들기 풍이 고조에 이르렀는데 상해부근지역에 개인정원이 수천개나 되였으나 예원은 그 설계나 그 아름다움이나 뛰여나
소주졸정원.태창의 산원과 함께 동남명원중의 으뜸이라는 별칭도 가지게 되였다.
반윤단이 이 정원의 이름 예원이라고 지은것은“(豫)예원 예자는 평안과 안온하다는 그런 의미로서 목적은 아버지로 하여금 이 정원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만년을 보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반은은 정원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되서 세상을 떠났고 예원은 사실상 반윤단자신이 노년을 즐길수 있는 그런 장소로 되였다.반윤단은 시간만 나면 연회를 베풀
어 친척지인들과 오락을 즐겼고 점쟁이를 불러다가 점도 보고 정원내에서 성대한 제사도
지냈고 귀뚜라미놀이,연띠우기,골동품매매,심지어 정원내에서 노비들도 때리고 쇠를 채우는등 형벌도 가했었고 스님들,상사,기생,문인들 등 많은 식객들이 예원으로 드나들었다.
이런 부화타락한 생활에 물젖은 반윤단은 이미 재산을 탕진할때로 탕진해 노년에는 이미 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반윤단이 죽은후에는 정원은 날로 쇄퇴해져 명나라 말기에는 반씨가문에 속했던 예원은 당시 통정사삼의직에 있었던 조카사위 장비림(张肇林)수중으로 들어갔고 그후에도 여러번 주인이 바꾸면서 정원도 여러가지 성씨를 가진 구역으로 나뉘여졌다.청나라 강희년초에는 상해일대의 신사들이 예원을 여러칸으로 나누어 청화서원으로 만들었고 중간청에는 당시 송강지부로 있었던 장승구(张升衢)가 매일마다 자기의 명예와 지위의 상승을 비는 장소로 되였는데 후에 파직되면서 예원은 다시 공사가 중지되고 수풀이 무성해졌고 채소밭으로 변해버렸다.
청나라 강희제 48년 1709년 상해신사들의 공공활동장소마련을 위해서 성황묘동쪽켠에 있는 땅2무를 사서 묘원을 건립하였는데 이름이 령원(灵苑)이고 즉 오늘날의 동원(예원내원)이고 건륭 25년 즉 1760년에는 일부 부유한 상인들이 돈을 모아서 묘당북쪽켠과 서북쪽의 대량의 예원의 유적을 사가지고 당년의 원림모습 그대로 회복을 하였는데 1784년에 완공이 되였고 약 20년후에 동원이 존재하였기에 서쪽에 수건한원림을 서원이라고 칭하였고 면적도 70무정도 였다.
수복이 끝난 서원.동원은 이미 사인정원은 아니였고 상해및 그 부근의 신사나 유명인들이 사교활동을 할수 있는 그런 원림으로 바뀌였고 그 구조나 설계는 기존에 있었던 반씨 가문의 예원 옛모습 그대로를 따랐으나 원래 연못가에 있던 낙수당을 없애고 대신 서원을 만들때 그 자리에 크고 높고 화려한 삼세당(三穗堂)을 만들었다.
아편전쟁시 예원은 많은 파손을 입었었는데 1842년 도광 22년 5월11일 영국군이 북문으로 쳐들어와서 예원과 성황묘내에 주둔하고 사령부를 호심정에 정한바가 있었고 1855년 함풍5년에는 소도회라는 봉기군이 청정부를 반대한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즉각 실패로 넘어가면서 봉기군 숙청에 나섰던 청나라군대도 예원에 자리를 틀고 있었었다.
따라서 香雪堂(향설당)、点春堂(점춘당)、桂花厅(계화정)、得月楼(득월루)、花神阁(화신각)、莲厅(연정)등은 정도부동하게 파손을 당하였고 함풍10년 태평군이 동정할때 청나라정부는 한때 서양군대의 지원을 요청했었는데 당시 서양지원군들도 역시 예원에 주둔하였고 당시 서원의 돌산을 전부 망가서 그돌로 못을 채워서 서양식 군영으로 만들었다.
청가정.도광년간 상해 상업이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 일부 상행들이 예원에 자리잡으면서 예원은 당시 상업에 종사하는 동업자들간의 제사활동.회의.연회등 활동을 벌리는 장소로도 이용되였고 통치7년에는 서원을 여러개의 동업공사로 분할하였고 각자가 돈을 내서 수복함에 따라 많은 차집 술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고 수많은 장사군들이 하나둘 예원에 모이기 시작했으며 연못서남쪽에는 일부 상점들이 하나둘 영업을 하기 시작햇다.1875년 예원내부는 이미 두미업.사탕업.방직업 등 업종을 비롯한 21개 공상업부문이 설립되였고 학교도 이미 세워졌다.민국초기 예원은 현재의 예원로에 의해 남과북 두부분으로 나뉘여졌고 역사적으로 보존해내려왔던 고대건물도 거의 파손되고 일부건물들은 이미 민가로 바뀌였다, 凝晖阁、清芬堂、濠乐舫、绿波廊등은 식당으로 변했고 딤섬.차집.향설당은 8.13 송호 중일전쟁시 일본군에게 파괴를 당하였고 点春堂(점춘당)、三穗堂(삼수당)、大假山(대가산)과 일부루각 및 고목들이 행운스럽게 전난속에서도 보존이 되였다、1956년 상해시정부에서 예원을 상해시문화국에서 직접 관리를 맡기고 예원에 대한 전반적인 수복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당시 상해민용설계원과 동계대학 건축학자들의 약 5년의피타는 노력과 그 당시 수백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이 소모되였다.
수복의 중점은 엄중히 파손 되였던三穗堂(삼수당)、玉华堂(옥화당)、会景楼(회경루)、九狮轩(구사현)등고대건물들였고 수복후 예원정문은 기존의 동쪽 안인가로부터 원서남으로 바뀌였고 연화못.호심정.및 구곡교 등 외부풍경으로 분리함으로써 ,정원의 크고작은 풍경구는 48곳으로 .구조는 동부.서부.중부 및 원내풍경구로 구분이 되였고 1961년9월 정식으로 관광지로 개방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의 사람받는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예원을 관광지로 개방한후에도 수복작업이 끊기지 않았는데 1956-1961년 수복시 경제난으로 인해서 옥화당.회경루등 코스는 재수복을 하였지만 다른곳은 재수복을 못하다보니 여전히 어딘가 평형을 잃은듯한 그런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했었다.문화대혁명기간에는 명나라때 환용교를 강제적으로 없애고 주위의 연못도 방호용동굴로 바뀌였으며 고대원림 모습도 완전히 파괴되면서 1982년 가산앞의 호석가산과 달팽이동 및 작은 가산의벽도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구정부에서는 급히 회의를 소집하고 위험한 지역에 대한 재수복에 들어갔으며 당시 고대원림풍격에 어울리지 않던 시멘트길도 고쳤고 총 23곳에 달하는 몇백군데를 재수복하였다.
1986년 3월 구정부에서 600만원을 투자하여 예원에 대한 재수복을 완성하였고 원림전문가인 진충주교수 및 박사생인 채달봉을 총설계사로 임명하고 청나라 건륭때의 예원의 분포도와 강남원림의 특점에 비추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했었다.
중국관광을 오셨던 분들 특히 상해관광을 하셨던 분들은 아마도 예원은 거의 빼놓지 않고 관광하셨으리라 믿지만은 진정한 예원의 역사를 알고 관광하셨더라면 오랜시간이 흘러도 사진속에 담겨있는 예원도 인상깊겟지만 그보다 마음속에 영원이 지워지지 않았던 예원관광이 되지 않았겠냐 하는 생각에서 예원을 역사적으로 소개해올렸다.차후에 중국 및 상해관광을 하실분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교 통:지하철10선 예원역.지하철14호선 예원역. 공공버스 11선.126선.926선.66선.969선.715선
위 치:상해황포구 안인가 132번
영업시간 :09:00-17:00(티켓판매시간은 오후16:30분까지입니다)
입장요금:40원/인(4월1일-6월30일.9월1일-11월30일)-성수기
30원/인(성수기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