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의 본명은 주수인((1881년9월25일—1936년10월19일)으로 절강성소흥태생이다.자는 예재이고 원명은 주장수인데 1898년에 주수인으로 개명을하고 자를豫山(예산)、豫亭(예정)이며 노신이라는 필명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노신의 작품에는 잡문.단편소설.평논.산문.번역작품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있으면 특시 5.4운동이후의 중국문학의 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 원로작가이다.모쩌우둥주석이 그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이며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서 중국문학혁명의 주장이며 중국인민으로부터 (민족혼)라고 불리울정도로 유명했으며 중년이후의 노신선생님은 항상 긴 남자용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짧은 머리를 하시고 긴 일자형수염을 기르시고 다니시면서 글을 쓰셧는데 일생동안 약 600만자에 달하는 그중에서 500만자에 달하는 저작을 남기셨고 편지등이 약 100만자정도에 달한다.노신선생님은 필을 무기로 삼아 일생동안 전투를 벌렸음으로 청년시기에는 진화론의 영향과 로씨야의 돌스또이등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02년에는 일본 홍문학원에 가서 유학공부를 하였으며 1904년에는 선대의과전문학원에 진학을 하였고 후에는 문예활동에 종사함으로 이로써 썩어빠진 국민의 정신을 개변하려고 하였다. 1905—1907년까지는 혁명당활동에 참가함으로《摩罗诗力说》、《文化偏至论》등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기간에 어머니명에 따라 귀국하여 부인 주안과 결혼하였고 1909년에는 동생 주작인과 함께《域外小说集》성외소설집을 번역함으로써 외국문화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고 같은 해에 귀국하여 선후로 항주와 소흥에서 교원직에 종사했다.신해혁명후 노신은 남경임시정부와 북경정부교육부부원.청화대학.여자사범대학등에서 겸직을 하면서 중국근대문학사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백화소설《狂人日记》(광인일기)를 씀으로 신문화운동의 기석이 되였고 신청년잡지작업에 참가함으로써 5.4신문화운동의 주장이 되였다.1918년부터 1926년사이에 연속 소설집(납함)(방황)등 명작과 잡문집 (분)(열풍)(화개집)등 산문시집 (야초) 회상산문집 (조화 석십)등 작품을 활발하게 창작하였다.1921년에 발표한(아Q정전)은 중국문화사상에서 한편의 역사를 시작한 명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926년 8월 북경학생들의 애국활동을 지지했었다는 이유로 당시 북양군벌정부에 체포령을 받자 남하하여 하문대학 중문계에서 계주임라는 직책을 맡고 당시 1927년 1월에는 당시 중국혁명의 심장지인 에는 광주로 와서 중산대학교무주임직에 계셧으며 1927년 10월에는 상해에 도착하여 당시 자기 학생이였던 허광평과 동거를 하면서 1929년에는 아들 주해영을 낳았고 1930년부터 선후로 중국자유운동대동맹.중국좌익작가연맹.중국민권보장동맹.등 조직에 가입하면서 국민당의 독재정치통치를 반대하는 활동을 활발히 벌렸다.1927년부터 1936년까지 발표한 작품들로는 (소설신편)(분)등과 같은 수많은 명작들을 남기셨다.1936년10월19일 페결핵으로 상해에서 세상을 떴으며 당시 수만명에 달하는 상해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였으며 그의 시신을 홍교만국국립묘지에 안장을 하였으며 1956년에는 노신선생님의 유체를 홍교공원으로 옮겨왔으며 모택동주석이 직접 노신묘라고 제사를 쓰셨다.현재한국관광객들이 상해에 와서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현장으로 알려진 홍구공원이 바로 노신선생님의 시신이 묻혀있는 있는 곳이며 이전에는 이곳을 노신공원이라고 불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