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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 만주사변과 역사현장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
작성자 : 한재철  작성일 : 2012-09-19  조회 : 2963
  •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 만주사변과 역사현장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

    1931년 9월18일 오늘은 중국주제 무관 경력의 관동군정보 참모 우두머리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 征四郎 1885년1월21일~1948년12월23일)와 관동군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 1889년1월18일~1949년8월15일)주도로 러일전쟁을 통하여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남만주철도 운영권이 중국의 자주권회복 운동 러시아의 남하등으로 위태롭자 철도노선중 심양북부 류탸오거우(柳條溝) 철도를 10:30분경 스스로 폭파하고 만주군벌의 소행으로 몰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괴뢰 국가를 설립하고 중국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날이다. 물론 일본은 중국대륙점령이라는 목표로 만주사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후로 착착 대륙침략전쟁이 진행된다. 대륙 침략의 가장큰 부담은 아무래도 조선과 다르게 지리적으로 먼 것과 중국대륙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확실한 현지 후방지원 병참기지가 필요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작전참모들이 주목하고 오래전부터 공들여온 인물이 바로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푸이였다. 청나라의 뿌리가 만주지역에 있었기에 더욱더 안성맞춤 인물로 푸이 많큰 바지황제로 내 세울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푸이도 이미 자금성에서 출궁 후 뒤를 봐주던 일본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28년 국민당 군벌 쑨디앤잉(孫殿英)의 군대가 북경에서 동북방향 140km에 위치한 청나라의 순치제,강희제,건륭제,함풍제,동치제,서태후등 역대 쟁쟁한 황제들을 모신 청동릉을 군자금을 조달 한다는 목적으로 도굴사건을 일으키자 국민당정부에 항의 책임자 처벌을 요청하였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자 내심 일본을 이용하여 청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 청나라의 근거지인 만주지역에 괴뢰정부를 수립한 일본의 의도를 알면서도 만주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목표는 바지황제 푸이를 통하여 대륙침략의 거점을 확보하고 더 나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청제국 황제에 대한 백성들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필요 했을 뿐이다.
       
    별다른 실권이 없던 푸이는 일본이 마련해준 바지황제 사무실로 마련해준 위만황궁(僞滿皇宮)에서 관동군의 철저한 감시와 지시를 따라 가며 만주제국의 바지황제로 대외적인 얼굴마담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푸이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등륵하지 까지의 격변기를 뒤돌아 보면 서태후라는 인물을 빼 놓을수 없을 것이다. 잠깐 서태후에서 마지막황제 푸이까지의 시간을 더듬어 보면 좀더 만주국 까지의 시간연결을 쉽게 해 볼수 있겠다.

    별 볼일 없던 집안 출신의 서태후(자희태후 1835년11월29일-1908년11월15일)는 애인을 버리고 1851년 16세에 함풍제 (咸豊帝,1831년7월17일~1861년8월22일) 의 궁녀로 들어가 환관들의 환심을 사고 황제와 합방기회를 잡아 황제의 유일한 아들까지 낳는데 성공하여 함풍제의 귀비로 총애를 받게 된다. 함풍제가 덜커덕 31세로 요정하고 27세에 과부가 된 서태후는 6살 아들 동치제 (同治帝, 1856년 4월27일~1875년 1월12일)가 황제로 등극하고 황제의 유지에 따라 황궁의 동쪽에 살던 정비 동태후와 서쪽에 거주하던 서태후 황친인 공친왕과 연대 동치중흥을 이끌며 한동안 청나라 말기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잠시 중흥기를 이끈다. 그러나 욕심이 많고 젊은 이 과부는 황제가 동태후을 따르고 황제가 결국 나이가 들어 친정을 하면 자신의 지위가 불안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명문가 출신 동태후가 주도하여 동치제의 황후를 동태후 가문 여인을 황후로 들이자 서태후는 환관등을 조정하여 동치제가 정사 보다는 환락에 빠지게 하여 궁밖 홍등가 출입을 조장한다. 동치제는 결국 성병에 걸서 사망하게 되고 임신중인 동태후 가문 황후도 자결하게 한후 자신의 동생과 함풍제의 동생 사이에 낳은 4살 광서제(光緖帝, 1871년8월14일~1908년11월14일)를 황제로 옹립한다. 동태우와 황실종친들을 밀어내고 결국 조정의 전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고향에 두고온 애인 영록을 궁으로 불러들여 젊음을 불태우고 남자를 바꿔 가며 권력의 힘을 즐긴다. 광서제를 서태후 가문의 황후와 결혼시키고 1889년 수렴첨정을 그만두고 형식상 이화원으로 물러나며 광서제의 친정을 선포를 하지만 광서제 에게는 그다지 큰 권력을 나눠주지 않아 힘이 없었다. 서태후는 해군의 돈을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데 써 청일전쟁(1894년-1895년)전쟁 패배의 큰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 패배후 광서제는 서태후세력을 몰아 내고 친정을 강화하고 캉유웨이,링히차오등의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군벌 위안스카이를 끌어 들이나 광서제를 배신하고 서태후 애인 영록에게 고자질하여 실패로 돌아가며 광서제는 자금성 영대에 유폐후 광서제 세력이 제거된다.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1908년 11월 14일 38세로 사망 하고 다음날 1908년 11월15일 연로한 서태후도 소화불량으로 사망하며 47년간 청나라 말기 통치에 종을 친다. 1908년 10월 다음 황제로 이미 서태후의 교지를 받고 있던 광서제의 이복동생 순친왕의 세살 아들 푸이(溥儀,1906년2월7일~1967년10월17일)가 마지막황제 12대 선통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푸이가 황제로 등극 하기 까지 수십년간은 청나라가 한 여인의 끊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물자가 털어 넣던 시기였던 것이다. 바지황제 푸이의 만주제국 위만황궁(僞滿皇宮)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푸이가 거처했던 집희루(緝熙樓) 앞에는 중국 장쩌민 지도자가 치욕적인 역사를 잊지 말자고 ”勿望(잊말자) 9,18”이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위만황궁박물원(僞滿皇宮博物院)으로 가는 청나라 마지막 역사탐사여행을 플래닛차이나투어가 만들어 드립니다.

    깊게 보는 중국여행 플래닛차이나투어 http://www.planetchinatou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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