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 함께한 여인들,, 그리고 서양선생 존스터,
신해혁명으로 더 이상 황제로서의 권한을 행사 할 수 없었지만 푸이는 계속해서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m²의 공간,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9999 개의 방이 있다고 하는 자금성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황제에 서양인 스승인 존스터가 자금성에는 환관 1,200명, 시녀 350명, 요리사 185명, 호위병과 군사들 840가구가 이름뿐인 황제를 보좌 를 구실로 서로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비판하다. 결국 황제의 창고를 조사하여 실상을 파악하려 하였으나 환관들의 방화로 실패한다.
황제가 되려면 권좌를 물려 받기전 황제의 검증을 거처 황태자로 지명되고 수업과 현장 체험을 통하여 황제로 등극후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수 있는 교육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푸이는 어느날 덜커덕 3살 짜리 젖먹이가 황제가되고 나니 황제 구실을 제대로 할수 없었고 격변기에 마지막 황제가 된 어린이 푸이는 인간적으로도 올바른 인격형성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황제가 되면서 자금성에 같이 들어와 젖을 먹이며 잠자리에 까지 함께 하던 나 유일한 안식처 였던 유모가 푸이가 8살이 되고 궁의 법도에 따라 출궁을 당하면서 더욱더 외로움이 많았을 것이다. 푸이는 결혼후에도 유모를 종종 자금성으로 불렀다고 하며 푸이가 자금성 출궁 후에도 지속적으로 유모를 만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나온 “후궁의 금지옥엽(後宮的金枝玉葉)” 한국에서 “황궁의 성”으로 출판된 황제의 성과 관련된 서적을 보면 푸이의 청나라시대 태자가 결혼적령기가 되면 나이가 많고 풍행이 좋은 궁녀를 선발하여 태자에게 성교육실습을 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황후를 맞이 했을 때 성과 관련된 지식이 없어 황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함과 황후와 후궁들을 통하여 다산하여 황제의 혈통을 번성시키는 목적이 있었다. 다산은 황제의 가장큰 의무중 하나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결혼후 황궁의 결혼제도를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푸이의 주변에는 평생 5명의 여성이 있었으며 매력적이고 미모가 뛰어난 동갑나이 17살 완룽(郭布羅婉容, 1906년~1946년)과 1922년 결혼하였으나 여자 완룽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1945년 8월 19일 선양(瀋陽)에서 비행기로 일본으로 탈출 하려다 쏘련 공수 부대에 잡혀 중국에 인계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1946년6월20일 40살에 연길감옥에서 슬픈 일생을 마감한다. 완룽은 푸이가 출궁당하고 천진생활과 만주제국 시기 까지 함께하며 푸이가 총애 하였다고 하나 부부생활은 없었다고 한다. 만주국시절 거주한 집희루에는 푸이와 왕룽의침실이 따로 있었다. 완룽은 혼외정사를 하여 임신을 하였고 이를 알았던 푸이는 아이를 낳자 마자 죽였다고 한다.

그후 완룽은 아편에 중독되었고 푸이로부터 멀어졌다 완룽이 감옥에서 사망후 시신은 낡은 돗자리에 말려 장소가 확인 되지 않은 곳에 묻혔다고 한다. 푸이는 유언으로 완룽과 합장되길 원해서 해방후 유골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여 사진을 합장하였다. 완룽은 유물로 손거울 한 개만 남겼다고 한다.

후궁으로 들어온 숙비-원슈(鄂爾徳特文繍, 1909년~1950년)를 12세에 완룽과 함께 들어온 이 여인은 완룽으로부터 시기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푸이가 출궁당하고 천진에서 생활 할 때 소외받던 이 여인은 1931년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여 황실 최초로 황제와 이혼한 여성이 된다. 그후 어린이 교육등으로 사회사업을 하며 독신으로 살다 1950년 사망했다.
만주제국을 중국대륙 점령을 발판으로 삶은 관동군은 장기적으로 푸이의 후계자를 생각하며 푸이에게 일본여성을 후궁으로 들인 것을 요구하였으나 푸이는 거절 했다고 한다. 푸이는 숙비원슈도 떠났고 완룽도 아편에 중독되자 다시 17세 만주족 처녀 탄위링(譚玉齡 1920~1942)을 1937년 3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7년을 함께 보낸 후 24살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푸이는 항상 탄위링의 사진을 몸에 지닐 정도로 탄위링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가벼운 병중에 일본인 의사의 처방을 받고 돌연사하여 관동군의 독살설이 있다.
탄위링이 사망후 1943년 15살의 한족처녀 리위친(李玉琴)을 4번째 부인으로 맞았고 이 여인은 푸이가 감옥에 있을 때도 지속적으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나이차이와 황제의 첩이라는 주변의 시선에 1956년(29살)에 이혼한 후 장춘티브 방송국의 엔지니어랑 결혼했다.
마지막으로 1962년 한족 30대의 처녀 간호사인 리수셴(李淑賢, 1925년~1997년6월9일)과 결혼하여 말년을 보냈다.
푸이와 함께 하였던 5명의 여인들의 여자로서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생활을 한 푸이의 한살어린 동생 푸취(溥傑 1907~1994)의 일본부인 사가 히로(嵯峨浩 1914~1987)는 자서전『流轉の王妃の昭和史』에서 검증할수 없지만 황제 푸이는 동성애자였다고 썼다.
1919년 13살 청소년 푸이 선생으로 자금성에 들어와 1924년 푸이가 출궁 당할 때 까지 황제의 사부를한 영국인 존스터는 푸이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 보면 존스터가 쓴 자서전을 바탕으로 푸이가 관동군에 자발적으로 협조 하였으며 관동군만이 저지른 731생체실험 만행을 추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삶이 중국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던 푸이의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장춘여행~ 플래닛차이나투어가 함께합니다.
깊게 보는 중국여행 플래닛차이나투어 http://www.planetchinatou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