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 하면서 한반도의 중앙아시아를 통한 서역과의 직교류가 중국 한족을 통한 간접교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가장 먼저 착수한 정책은 고구려인의 강제 이주를 통한 분산정책이다.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당시 수십만의 고구려 백성들은 대륙의 변방 각지역으로 강제 이주 하였으며 안서도호부가 있던 감숙성지역에도 많은 수의 고구려인이 강제 이주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안서도호부가 있던 감숙성지역은 고구려의 근거지인 한반도 북쪽에서 내몽고초원을 지나면 접근 할수 있는 초원의 끝 부분에 위치한 지역이다. 고구려 유민으로 중국역사 뿐만 아니라 서역 이슬람세계를 거처 서양사에도 큰 역사적 족적을 남긴 고선지 장군은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한민족 출신이다. 고선지(高仙芝, ? ~ 756)는 안서도호부에서 군인으로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던 아버지 고사계(高斯界)를 따라 일찍이 군에 몸담아 20대에 유격장군으로 발탁 될 정도로 뛰어난 군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세력이 커지는 토번으로 인해 실크로드길이 막혀 중앙아시에서 오는 공물이 끈겨 이를 회복하고자 안서도호부를 동원하여 3차례의 원정을 하지만 거듭 실패중이었다. 당현종은 고선지장군을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고 746년 12월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안서도호부의 군사주둔지 쿠차를 떠나 토번을 정벌 하게 한다. 고선지장군은 파미르고원을 넘어 기습작전으로 토번의 요새 연운보(아프가니스탄, 사르하트)를 함락시키고 안서도지병마사(安西都知兵馬事)가 되어 747년 7월에는 토번의 영향권에 있던 소발률국(小勃律國 북부 파키스탄) 또한 대군을 이끌고 해발 4694m의 탄구령을 넘는 불가능한 작전을 성공 시키며 정벌한다. 이후 중앙아시아 72개국이 당(唐)에 복속하고 조공하게 되었다. 고선지장군은 747년 1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가 되어 실크로길을 다스린다. 석국(石國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을 정벌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제수 받았으며 왕이 조공 하지 않자 장안으로 압송한다. 석국 왕이 당나라 조정에 의해 살해 당하자 이슬람세계가 연합하여 당나라에 대항하자 고선지장군은 사라센의 아바스왕조의 이슬람연합군과 탈라스(키르키스탄)강 서역에서 751년 7월 말 닷새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으나 당 연합군에 속해 있던 케르룩 군대의 반란으로 고선지가 이끈 7만의 당군이 전멸 할 정도로 패하고 2만 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간다. 당시 원정군에는 다양한 기술자도 동원되었는데 그중에 있던 제지 기술자들 이 사마르칸트에 제지 기술을 전수하여 사마르칸트가 이슬람의 제지사업의 중심지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지 기술은 서양에 전래되어 중세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당시 두환 이라는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 지중해지역까지 끌려 갔다 사라센의 여러나라를 전전하다 762년 페르시아만에서 상선을 이용하여 중국 광주를 통하여 귀국하여 다시 장안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당시 본 내용은 경행기라는 저서를 남겼다고 한다,

고선지장군은 이후 범양절도사(하동,평노겸직) 안녹산과 사사명이 안사의 난(755년 12월~763년 2월)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고선지장군 부장이었던 봉상청을 범양절도사로 임명하여 난을 막으라고 파견하나 패하고 반란군이 낙양을 점령하자 결국 현종은 왕자를 정토원수 고선지장군을 토적부원수로 임명하고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으로 위무하며 전송하고 섬주(陝州 하남성 삼문)에서 안녹산의 서진을 저지하도록 파견 하였다. 고선지장군은 섬주 태수 두정지(竇廷芝)가 반란군으로 도망하고 반란군이 섬주에 들이 닥치자 후방에서 반란군을 막는 동안 봉상청의 건의을 받아들여 부대를 장안으로 들어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동관(潼關)으로 전략적인 후퇴 하게 하고 장군은 직접 정부물자를 보관하던 태원창(太原倉)을 열어 비단과 돈을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반란군이 이용 못하게 불사르게 한다. 낙약의 함가창(含嘉倉)에서 300리 떨어진 섬주의 태원창은 중국 안동지방에서 수운을 통하여 올라 오는 조공물자를 보관하는 중요한 물자 보급창고였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결국 동관에서 고선지장군에 저지 당해 장안 진입이 실패 하지만 고선지장군은 황제의 감군(監軍)으로 파견된 변령성(邊令誠)의 모함을 받고 진중에서 756년 1월 24일 참수 당한다. 변령성은 태창원의 물자는 군사들에게 나눠준 것은 재물 욕심이 많다고 모함하고 동관으로 후퇴한 것을 황명을 거역한 반역죄로 몰았으나 당시 군사들은 비상시국에서 대가를 받기로하고 모집한 군사였기에 사기진작에 필요한 조치였고 반란군이 섬주를 우회해 동관을 통과 한다면 쉽게 장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 전쟁의 상황파악에 뛰어난 고선지장군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전 판단이었다. 결국 이후 고선지장군 후임 가서한(哥舒翰)이 동관에서 패하고 장안은 반란군에 점령되면서 현종은 피난을 떠나게 된다. 이후 당나라는 패망의 길로들어서 중국대륙 전체에도 문화적 정치적 큰 변화를 가저온 계기가 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은 살아온 고선지장군은 결국 정치적인 이유로 모함을 받아 생을 마감한다.
역사의 발전은 진보와 후퇴를 같이 한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미래발전은 한반도를 넘어가는 새로운 육로 실크로드 길을 개척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여행 좀더 알면 더 길게 볼수 있다.
깊게 보는 중국여행
플래닛차이나투어 http://www.planetchinatou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