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리는 하문은 중국남부 열대지방 중 한 곳이다. 하문은 지금의 중국인들에게 많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 역사적 의미 중 하나를 명나라 말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라가 망해 갈 때 의기가 있는 사람들이 일어서 기울어저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을 하지만 대부분은 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기울어저 가는 명나라(1368∼1644)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한 많은 사람중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성공은 일본과 무역을 하던 아버지와 하급 사무라이의 딸 사이에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서 태어나 7살에 난징의 태학에 입학 한문을 배웠다. 명나라가 망하자 당왕 용무제를 옹립하여 명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용무제로부터 국가의 성씨인 주씨 성을 하사 받고 이름을 주성공(朱成功)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일본을 떠난지 15년만에 어머니가 찾아와 상봉을 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스스로 자진 했다 한다. 1650년 부터는 아버지의 해상무역 근거지인 금문도(진먼)과 하문(셔면-아모이)을 기반으로 군비를 확충하여 양쯔강을 통하여 난징을 공략하였으나 청나라 청나라(1636∼1912)에 패하고 하문으로 퇴각 이후 청나라의 해상봉쇄 정책으로 고립되자 당시 네델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타이완(臺灣)을 공략하여 네델란드인 들을 몰아 내고 근거지로 삼는다. 그러나 갑작 스럽게 이 의국지사는 1662년 39세를 일기로 급사하였다,
하문은 이민족 청나라로부터 한족제국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정성공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고 청나라 말기에는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난징조약에 의해 개항되어 외국세력의 대륙침략 근거지 항구로 개발하여 대륙 침략의 발판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하문은 다시 한번 청나라 멸망후 치열한 국공 내전으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후퇴하고 금문도를 본토수복 전진 기지화 하면서 중국 공산당 정부와 타이완 국민당 정부의 치열한 교전지역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저 오고 있다.


금문도로부터 2km 정도 떨어저 있는 지금의 하문은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중국의 통일정책의 현장이 되고 있어 현장에서 생각해본 한반도의 통일정책 현실과 중국의 통일정책을 비교 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동안 서로 포격전을 하던 해변지역이 지금의 해수욕장으로 변해 있어 불과 몇십년전에 서로 포격을 가하던 곳 이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롭다. 중국은 지금 대외적으로 많은 부분을 개방중에 있다.
하문하면 아직까지는 한국의 겨울기간 골프인들이 방문하여 골프나 즐기고 여흥이나 즐기는 정도의 관광지로 알려저 있지만 좀더 깊게 들여다 보면 다양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깊게 보는 중국여행 플래닛차이나투어 http://www.planetchinatou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