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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역사상 제일 잘 나갔던 15명 황후들 시리즈(자희태후)
작성자 : 상하이  작성일 : 2011-10-13  조회 : 2678
  • 중국 청나라 함풍황제( 1850~61 재위)의 후궁이며, 동치황제( 1861~75 재위)의 어머니인 자희태후는 함풍제의 죽자 아들 재순이 동치제가 되어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모후로서 동태후(東太后: 함풍제의 황후인 안황태후와 함께 섭정을 하었다. 외국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적인 세관을 설치했다. 유럽식의 군수공장을 세웠고 외교 담당부서도 처음으로 만들었다. 대내적으로도 정부의 부패를 종식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력을 이용하여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 국정의 실권은 이미 서태후의 손에서 좌우지 되고 있었다. 1898년 불만을 느낀 광서제가 입헌파 강유위를 중용하여,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노리자, 서태후는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8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으로 피신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외국공사관들도 공격을 받자 외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따라 서태후는 북경을 떠나 일련의 치욕스러운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 ·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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